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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덕에 저는 남들 보다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고,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58. 직업군인이신 아버지께서는 엄하시기도 하셨지만 유머감각 또한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항상 저와 동생이 잘못을 해 혼을 내신 다음에는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풀이 죽어 있는 저희들을 달래주곤 하셨습니다. 또 평생을 군인의 아내로 살아오신 어머니는 저에게는 늘 친구와도 같은 분이셨으며 항상 화목하고 밝은 분위기를 만들고자 노력하셨습니다. 체격이 좋으시고 건장한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저는 꼬마 시절부터 형들과 함께 동네에 있는 학교 운동장에 살다시피 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다쳤습니다. 지금도 몸 곳곳에 그 때의 흉터들이 훈장처럼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어울림으로써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법을 배웠으며, 어렸을 적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전학을 많이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모두 원만한 교우관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한편 중학교 때 우연히 TV를 보다가 기타에 관심을 가지게 된 저는 중3때부터 기타를 배우게 되었고, 고등학교 때는 밴드활동을 잠시 하기도 하였습니다. 기타는 평생의 제 취미가 되었고, 기타를 들고 무대에 섰던 경험들은 남들 앞에 설 때 자신감을 갖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59. 태권도장 관장이신 아버지와, 미술 선생님이신 어머니 사이에서 3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난 저는 어렸을 때부터 활발한 아이였습니다. 특히나 아버지의 태권도장에서 어렸을 적부터 운동을 시작해서 동네에서 골목대장을 도맡아 했습니다. 또한 어린 시절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여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는 남자아이들을 혼내 주기도 하여 여자 아이들로부터 인기가 많았습니다. 한편 저는 부모님이 집에 안계실 때면 5살 차이가 나는 쌍둥이 남동생들을 보살펴야 했기에 자연스럽게 리더쉽을 익힐수 있었으며, 학창시절에 반장과 회장을 도맡아 하곤했습니다. 또 대학시절 틈이 날 때 마다 아버지 체육관에서 사범으로써 일을 도왔고, 군에 입대해서는 태권도 경력 때문에 조교로 선발되어 많은 훈련병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특히 조교로써 군생활을 하며 수 많은 사람들을 통솔하는 능력을 배울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대하는 대인관계 기술 또한 익힐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저의 성장과정은 활달하고, 적극적인 지금의 제 모습을 위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60. 건설회사에 다니시는 아버지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축구선수로 활약하셨던 스포츠맨 이십니다. 비록 고등학교 시절 경기도중 거친 태클을 당해 심각한 발목부상을 당하시면서 축구선수의 꿈을 포기하셨지만, 여전히 운동을 좋아하실 만큼 활동적인 분이십니다. 한편 중학교 때 수영선수로 활약하셨던 어머님께서는 지금은 사회복지 일을 하고 계십니다. 아직도 어머니와 수영시합을 하면 제가 이길 수 없을 만큼 어머니는 뛰어난 수영실력을 자랑하십니다. 이런 부모님 덕분에 저와 저의 여동생은 둘다 뛰어난 운동신경을 자랑합니다. 여동생은 왠만한 남자들만큼 달리기가 빨라 학창시절 항상 청백계주 선수였고, 저는 달리기는 물론 못하는 운동이 없어 고등학교 시절 축구동아리 주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부모님께서는 운동을 좋아하시는 만큼 개방적인 분위기도 좋아하셨습니다. 때문에 저희 집에는 늘 웃음꽃이 끊이지 않았으며,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 가족회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는 저희 남매를 활달하고, 창의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어딜 가나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또한 훗날 가정을 이룬다면 이러한 가족 분위기를 형성하여 가정을 일구고 싶은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61. 저는 군산에서 해물칼국수 집을 운영하셨던 부모님의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해물 칼국수집을 운영하셨던 부모님의 손맛은 입소문이 자자했고, 운좋게 방송까지 타면서부터 저희 집은 항상 손님으로 붐볐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손님들로 발 디딜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성실하시고, 우직하신 부모님께서는 재료값이 올라도, 서민들 먹는 칼국수 값 올리면, 사람들 눈가에 주름생기신다며 칼국수값을 10년이 넘도록 유지 하셨고, 가게를 확장하고, 대형화 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충고에도, 가게 넓히고, 종업원들 쓰기 시작하면 예전 그 맛이 날 수가 없다면서 10평짜리 가게를 계속 유지 하셨습니다. 비록 남들은 부자가 될 기회를 놓친 거라며 핀잔을 하기도 하지만 저는 그런 저희 부모님이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적어도 자기가 몸 담고 있는 분야에서 최고의 프로의식을 보여주시는 부모님의 일에 대한 열정이 너무나도 멋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내가 그 분야의 장인이 되리라는 마음 가짐으로 임해야 겠다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젠 자동차 생산분야 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고 최고가 되려는 마음으로 항상 솔선수범하려 마음 먹고 있습니다.
62.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근면하신 아버님과 자식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어머님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하였습니다. 비록 아버님께서 운영하는 회사의 부도로 잠시 고생을 했지만, 가족들의 서로에 대한 믿음과 인내로 잘 이겨냈고, 전보다 더욱 돈독한 가족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련 덕분에 절약하는 습관과 세상을 항상 밝고 긍정적으로 보려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비 온 뒤에 반드시 무지개가 뜬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형제관계는 아래로 4살 차이가 나는 쌍둥이 여동생 둘이 있는데, 아버지가 집을 비우실 때면 내가 가장이란 책임감이 느껴져 여동생 둘을 마치 딸처럼 보살피곤 했습니다. 어렸을 적 한 번은 부모님께서 외출을 하시며 점심을 시켜 먹으라고 5000원을 주고 가셨는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동생들을 위해 내 몫의 점심을 굶고 그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런 습관들이 지금도 남았는지 대학시절 여자 후배들은 제게 오빠보다는 푸근한 아빠 같다는 농담을 많이 하곤 했습니다.
  • 가격3,000
  • 페이지수26페이지
  • 등록일2011.03.04
  • 저작시기201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5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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