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의 31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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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밀양의 31만세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밀양에서 일어난 만세의거

1) 3.13 밀양만세의거 2) 밀양소년단 만세의거 3) 밀양시회(密陽詩會)의 의거 4) 안희원 장송 행렬의 만세시위 5) 단장면 태룡리(台龍里) 만세의거 6) 부북면 춘화교회에 시작된 춘화리(春化里) 만세의거 7) 청도면 인산리 만세의거 8) 밀양 기독교 청년회 사건

2. 밀양지역 만세운동과 기독교인들의 역할

3. 의열단 창단과 의열 투쟁

맺음말

본문내용

적 투쟁방법인 암살과 파괴·폭파라는 방법을 통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의열단은 암살과 파괴의 대상을 명확히 한정하고 있었으며 특히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총독부와 총독, 식민통치기관들을 직접 겨냥한 거사에 주력했다. 또한 신흥무관출신의 김원봉 등은 이미 신흥무관학교의 학생 때 폭탄제조법을 배운 바 있었고, 이 무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별동대인 구국모험단의 김성근이 폭탄제조를 연구하고 있었으므로 의열단 단원들은 그를 길림으로 초빙하여 상해에서 익힌 폭탄제조법의 기술을 배우기도 하였다.
의열단 초기의 의거들로는 밀양 폭탄 반입 사건,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최수봉의 밀양 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등이 있다. 먼저 밀양 폭탄 사건은 김원봉과 이성우가 1920년 5월 폭탄을 의류 상자 속에 섞어서 부산으로 보냈다가 발각된 사건으로, 당시 김원봉 외 2인을 제외한 의열단원 전원이 국내로 잠입하여 거사를 준비하였는데, 6월 16일 서울 인사동에서 회의 중에 경기도 경찰부의 급습을 받아 이성우, 황상규, 윤세주 등 6명이 체포되었고 폭탄과 무기들 역시 모두 압수되었다. 이 사건으로 20명이 검거되고 15명이 기소되면서 밀양 폭탄 의거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의열단이 처음으로 성공했던 거사는 1920년 9월 14일 단원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경찰서장을 절명케 한 사건으로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한 박재혁은 부산으로 돌아와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1921년 5월 단식투쟁 끝에 순국하였다. 뒤이어 최수봉의 밀양 경찰서 폭탄 사건 이후 1921년에 들어서면서 의열단의 투쟁이 더욱 본격화됨에 따라 의열단은 1926년까지 김익상의 의거와 황포탄 사건, 그리고 김상옥, 황옥, 김지섭, 나석주 등의 의거를 연이어 일으켰다.
이의열단에는밀양사람들이많았다(독립운동초기만주지역으로진출한자및의열단참가자는18명이다).그중대표적으로춘화교회설립자가문의지강(芝江)김성수(1900-1977),춘화교회 제2대장로였던김래봉과밀양교회설립자고삼종의 장남인고인덕,마산교회출신의최수봉,그리고부산동래출신으로의열단단장인김원봉의아내였던 박차정등이의열단에가담하여적극적으로독립운동에가담했다.이들은하나님은정의의신이요,하나님나라는정의가지배하는나라이므로하나님의 백성들인교회는그가속한나라가하나님의뜻에 어긋난길을갈때는항거해야한다는신앙이바탕이되었기에일제와항거했고,조선의독립으로정의가 다스려지는자주국가를열망햇던것이다.의열단에가담했던기독교인들은악에대해침묵하지않았다.
맺음 말
1919년 3월 13일부터 시작된 8차례의 만세시위에서 밀양지역의 기독교인들의 참여는 대단했다. 4월 6일 춘하리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김영환 밀양시 부북면 춘화리에서 1900년 6월 8일 출생.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4월 6일 춘화리 의거에 동참. 후에 평양에서 숭실대와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졸업(27회, 1932년). 덴마크국제국민대학 졸업. 고성읍교회, 창원교회, 진주봉래정교회 시무. 경남노회 공로목사.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1985년 10월 23일 소천. (사)삼일동지회, 《3.1독립선언서해설서》(1971), 117.
은 당시 기독교청년회원으로 김성수 등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가해 선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1933년 여름 진주 남성교회에서 애국 설교 중 찬송가 ‘삼천리반도금수강산’을 찬송하다가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29일 동안 구금을 당하고 1938년 5월경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하다가 4개월간 체포되어 구금을 당하는 등 항일운동을 하였다. 그는 삼일동지회에서 펴낸 책 (사)삼일동지회, 앞의 책, 117.
에서 “겨레여 우리에겐 조국이 있다. 내 사랑 바칠 곳은 오직 여기뿐. 심장에 끓는 피가 식을 때까지 즐거이 이 강산에 노래 부르자”는 글을 남겼다. 밀양지역의 기독교인들은 민족의 아픔과 함께하며 희생할 줄 아는 애국 애족의 사람들이었다. 당시 유교적 관습에 따르면 아녀자들은 나서지 말아야 할 일에 신앙인으로서 불의에 대항해서 일어설 줄 알았던 여성들이 바로 밀양의 여성 기독인들이었다. 그리고 밀양의 기독교인들은 3.1운동이 비폭력운동으로 시작되어 무장화되지 못한 결과로 많은 피해를 입게 된 것을 교훈으로 삼아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겨 의열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즉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은정의의신이요,하나님나라는정의가지배하는나라이므로 조선의독립으로정의가 다스려지는자주국가를열망했고, 악에대해서는침묵하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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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3.15
  • 저작시기2019.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88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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