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차
1, 요약
2, 감상
참고문헌
1, 요약
혜강 최한기(1803년 10월 26일 ~ 1879년 6월 21일)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지리학자, 철학자, 사상가, 저술가이다. 본관은 삭녕(朔寧)이고, 자는 운로(芸老) 또는 지로(芝老), 호는 혜강(惠崗)·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이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1800년 개혁군주인 정조가 급서하고 아들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정국은 다시 세도정치의 파행으로 치달을 무렵이었다. 정조는 일찍부터 탕평책을 계승하고 외척의
1, 요약
2, 감상
참고문헌
1, 요약
혜강 최한기(1803년 10월 26일 ~ 1879년 6월 21일)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지리학자, 철학자, 사상가, 저술가이다. 본관은 삭녕(朔寧)이고, 자는 운로(芸老) 또는 지로(芝老), 호는 혜강(惠崗)·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이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1800년 개혁군주인 정조가 급서하고 아들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정국은 다시 세도정치의 파행으로 치달을 무렵이었다. 정조는 일찍부터 탕평책을 계승하고 외척의
본문내용
연과학과 기술, 당대의 세계정세까지 열람할 수 있는 지적, 물적 환경이 설정된 것이다. 그는 당대를 짓누르던 백성들의 피폐한 삶과 그것을 야기한 사회적 모순을 총체적으로 인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독창적인 학문적 시각을 글로 표현할 능력이 있었고 그러한 활동의 총제가 기측체의에 담겨 있다.
당대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바람과 다르게 최한기가 활동했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우리 민족은 타율적인 근대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일제의 탄압과 압박 속에서 전통학문과 철학은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파기 당하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일본이 서구로부터 수입한 근대의 문물이 무비판적으로 유입되었다.
식민지 지식인들은 자주적인 개방과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였다는 좌절감을 안고 조급하게 민족적 자긍심을 회복하려 들거나 혹은 지나치게 서구문화에 압도되어 전통사상을 경시하고 그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려고 하였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문화와 처지에 맞게 개조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여과 없이 타인의 의도가 투입된 의제를 그냥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최한기는 기측체의 등 그의 기 철학 전반의 저작을 통해 개항 이전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구학문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전통학문과 접목시킨 마지막 철학자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서구학문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전통철학을 계승하고 외세의 억압에 의해 균형을 잃은 이후의 학자들이 처한 것과 같은 학문적 조건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렇게 때문에 외적 강제에 굴절되지 않고 기존 삶의 세계를 기반으로 전통과 서구, 철학과 과학의 상호 충돌과 변용, 융합을 이루어 내는 실험을 기측체의를 통해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그의 사상은 이후 개화적인 사상을 가진 신진 학자들을 중심으로 그 영향력을 지속하였다.
“마음은 따로 능한 것이 없고 기를 말미암아서 미루고 성을 말미암아서 헤아리어 점차로 계제를 밟아서 그 공효를 이루니 이것을 이름하여 앎이라 한다.” p 69
그러므로 기측체의에서 최한기가 말하고자 한 바는 추측하는 것, 추상적인 사고능력을 발휘하여 생각하는 것 외에 기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추측은 보지 않고 그 아는 것만을 보면 신기하다 할 수 있고 그 추측을 말미암아서 더욱 미루고 헤아리면 그것을 신통하다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최한기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독창적인 철학을 계승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취한 학문적 태도와 방법론이 오늘의 문제적 상황 속에서 잘 녹아들고 현대가 처한 문제들을 시정하는데 나름의 시각을 제공할 뿐 아니라 지금 진행하고 있는 전통철학의 발전 방향과 그 해석에 대한 모색에 있어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이질적인 문화에서 파생된 학문들이 서로 융합해가면서 사상적인 접점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열린 시각으로 혼재된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해갈 수 있는 창조적 가능성을 보여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류종렬 외, 『동서양고전의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당대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바람과 다르게 최한기가 활동했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우리 민족은 타율적인 근대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일제의 탄압과 압박 속에서 전통학문과 철학은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파기 당하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일본이 서구로부터 수입한 근대의 문물이 무비판적으로 유입되었다.
식민지 지식인들은 자주적인 개방과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였다는 좌절감을 안고 조급하게 민족적 자긍심을 회복하려 들거나 혹은 지나치게 서구문화에 압도되어 전통사상을 경시하고 그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려고 하였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문화와 처지에 맞게 개조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여과 없이 타인의 의도가 투입된 의제를 그냥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최한기는 기측체의 등 그의 기 철학 전반의 저작을 통해 개항 이전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구학문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전통학문과 접목시킨 마지막 철학자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서구학문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전통철학을 계승하고 외세의 억압에 의해 균형을 잃은 이후의 학자들이 처한 것과 같은 학문적 조건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렇게 때문에 외적 강제에 굴절되지 않고 기존 삶의 세계를 기반으로 전통과 서구, 철학과 과학의 상호 충돌과 변용, 융합을 이루어 내는 실험을 기측체의를 통해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그의 사상은 이후 개화적인 사상을 가진 신진 학자들을 중심으로 그 영향력을 지속하였다.
“마음은 따로 능한 것이 없고 기를 말미암아서 미루고 성을 말미암아서 헤아리어 점차로 계제를 밟아서 그 공효를 이루니 이것을 이름하여 앎이라 한다.” p 69
그러므로 기측체의에서 최한기가 말하고자 한 바는 추측하는 것, 추상적인 사고능력을 발휘하여 생각하는 것 외에 기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추측은 보지 않고 그 아는 것만을 보면 신기하다 할 수 있고 그 추측을 말미암아서 더욱 미루고 헤아리면 그것을 신통하다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최한기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독창적인 철학을 계승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취한 학문적 태도와 방법론이 오늘의 문제적 상황 속에서 잘 녹아들고 현대가 처한 문제들을 시정하는데 나름의 시각을 제공할 뿐 아니라 지금 진행하고 있는 전통철학의 발전 방향과 그 해석에 대한 모색에 있어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이질적인 문화에서 파생된 학문들이 서로 융합해가면서 사상적인 접점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열린 시각으로 혼재된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해갈 수 있는 창조적 가능성을 보여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류종렬 외, 『동서양고전의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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