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 - 조선의 왕자 ‘사도세자’ 그는 패륜아인가??
2. 사도세자의 출생 - ‘41세 영조’ 기다림 끝에 새 아이를 얻다.
3. 사도세자의 정치입문 - ‘58세 영조’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다.
4. 사도세자의 대위기 - ‘나주괘서사건’ 탕평책의 원리가 무너지다.
5. 비극적인 가족의 결말 - ‘나경언의 고변사건’, 영조 크게 분노하다.
6. 결론 - 부당·자당,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왕과 신하 우리 모두이다!”
2. 사도세자의 출생 - ‘41세 영조’ 기다림 끝에 새 아이를 얻다.
3. 사도세자의 정치입문 - ‘58세 영조’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다.
4. 사도세자의 대위기 - ‘나주괘서사건’ 탕평책의 원리가 무너지다.
5. 비극적인 가족의 결말 - ‘나경언의 고변사건’, 영조 크게 분노하다.
6. 결론 - 부당·자당,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왕과 신하 우리 모두이다!”
본문내용
러싼 소론, 노론의 대결과 당쟁 등 다양한 요인이 원인으로 언급된다.
임오화변은 윤 5월 3일 영조가 사도세자를 갑자기 창덕궁으로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영조는 세자를 데리고 숙종의 위패가 있는 선원전으로 갔는데, 영조는 주로 흉한 일을 할 때만 경화문을 통과하곤 했다. 즉, 이는 곧 흉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암시였다. 영조는 이내 사도세자와 정성왕후 서씨의 신위에 행례를 했는데, 직후 신의 말을 들었는가 물으며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라고 정성왕후가 말했다고 언급한다. 순간 영조는 군사적 조치로 궁궐의 문을 모두 걸어잠가 통제하였으며 사도세자를 추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춘방의 신하들이 사도세자를 막으면서 자결시도는 실패했고, 영조는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갈 것을 명했다.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여길 것이라 말했고, 직접 뒤주에 못을 박아 세자를 가두었다.
▶결론 - 부당·자당,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왕과 신하 우리 모두이다!”
사도세자는 역사적으로 가장 나약한 세자일지 모르지만 선천적으로 악마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사도세자는 앞서 말했듯, 장인어른에게 안부를 챙겨 묻는 서신을 보내는 등의 도덕적인 면모도 있었으며, 이외에도 장인에게 남한형지, 양향군무도서를 보내 주심이 어떻냐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한강이남의 지도, 군사, 말, 곡물 등에 관한 책을 의미함.) 이는 곧 사도세자가 아픈 와중에도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려 노력했음을 뜻한다. 더불어서 사도세자는 자신의 병을 인지해 맞는 약을 구하고자 하기도 했다. 일본 야마구치 도서관에 있는 사도세자의 어필 서첩 자료에 따르면 1756년 사도세자는 장인어른에게 “약을 잘 알고계시니 울화를 씻는 약을 보내주심이 어떻겠습니까?”라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조그맣게 들어가 있는 ‘몰래 정’ 한자인데, 이는 곧 영조가 알기를 원치 않았음을 의미한다. 영조는 아버지의 위상에 비해 모자라고 부덕한 자신을 항상 책망했다고 생각한다. 1754년의 편지에는 의원과 병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사도세자의 아버지의 위상에 위축되고 억눌려 있는 감정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도세자가 정신적으로 위축되었던 점은 아버지 영조의 강한 요구와 기대, 확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도세자의 재능을 잘 살리지 못하고 소통이 부족했던 점도 큰 요인 중에 하나다. 영조는 신문고를 부활시키기도 하는등 애민정책을 펼친 명석한 군주였지만 좋은 아버지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사도세자를 진짜 괴물로 만든 것은 정치권력에 대한 갈망과 광기에 둘러싸인 노론과 소론세력이지 않을까? 사도세자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소론과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역모의 소지는 없었다. 게다가 1752년 사도세자가 등용한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들은 역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1728년 있었던 이인좌의 난(소론의 반란)을 반대하고 진압하는데 참여한 고마운 인물들이었다. 사도세자는 단순히 영조의 탕평을 따르며 정치적 조화를 꿈꿨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영조를 의심으로 내몰고 사도세자를 파멸에 가깝게 만든 진범은 권력에 눈이먼 노론세력들이었다,
이를 반증하는 모습은 훗날의 영조에게서 드러난다. 영조는 나경언이 거짓 고변을 실토한 이후 처분을 미루는 태도를 보였으며, 오히려 조사를 촉구하는 신하를 꾸짖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고 한다. 영조는 이 모든 것이 노론의 당쟁과 계략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음을, 나경언의 처벌은 단순한 화풀이에 불과했음을, 권력에 대한 노론의 갈망과 자신의 의심이 불러온 결말이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조정의 신하들을 보고 “부당 자당이 되었으니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역적이오!”라고 격분하였다고 한다.
오늘 날 우리의 사회도 간혹 정치인들의 자녀들이 특혜, 비리로 주목받는 모습을 보면 이러한 정치적 당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지금도 한국 어디선가는 제2의, 제3의 사도세자가 나타나고 있지는 않을까?
[참고문헌]
>다큐멘터리
*KBS 역사저널 그날, 한국사전 6회 「아버지의 눈물, 영조」, 2007-07-21 방송
*KBS 역사저널 그날, 한국사전 18회 「무인, 정조대왕」, 2007-10-27 방송
>사이트
*한국 위키피디아, 「조선 경종」, 2020-04-02 수정
*한국 위키피디아, 「조선 영조」, 2020-04-11 수정
*한국 위키피디아, 「조선 장조(사도세자)」, 2020-04-11 수정
*한국 위키피디아, 「붕당」, 2019-04-17 수정
임오화변은 윤 5월 3일 영조가 사도세자를 갑자기 창덕궁으로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영조는 세자를 데리고 숙종의 위패가 있는 선원전으로 갔는데, 영조는 주로 흉한 일을 할 때만 경화문을 통과하곤 했다. 즉, 이는 곧 흉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암시였다. 영조는 이내 사도세자와 정성왕후 서씨의 신위에 행례를 했는데, 직후 신의 말을 들었는가 물으며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라고 정성왕후가 말했다고 언급한다. 순간 영조는 군사적 조치로 궁궐의 문을 모두 걸어잠가 통제하였으며 사도세자를 추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춘방의 신하들이 사도세자를 막으면서 자결시도는 실패했고, 영조는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갈 것을 명했다.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여길 것이라 말했고, 직접 뒤주에 못을 박아 세자를 가두었다.
▶결론 - 부당·자당,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왕과 신하 우리 모두이다!”
사도세자는 역사적으로 가장 나약한 세자일지 모르지만 선천적으로 악마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사도세자는 앞서 말했듯, 장인어른에게 안부를 챙겨 묻는 서신을 보내는 등의 도덕적인 면모도 있었으며, 이외에도 장인에게 남한형지, 양향군무도서를 보내 주심이 어떻냐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한강이남의 지도, 군사, 말, 곡물 등에 관한 책을 의미함.) 이는 곧 사도세자가 아픈 와중에도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려 노력했음을 뜻한다. 더불어서 사도세자는 자신의 병을 인지해 맞는 약을 구하고자 하기도 했다. 일본 야마구치 도서관에 있는 사도세자의 어필 서첩 자료에 따르면 1756년 사도세자는 장인어른에게 “약을 잘 알고계시니 울화를 씻는 약을 보내주심이 어떻겠습니까?”라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조그맣게 들어가 있는 ‘몰래 정’ 한자인데, 이는 곧 영조가 알기를 원치 않았음을 의미한다. 영조는 아버지의 위상에 비해 모자라고 부덕한 자신을 항상 책망했다고 생각한다. 1754년의 편지에는 의원과 병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사도세자의 아버지의 위상에 위축되고 억눌려 있는 감정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도세자가 정신적으로 위축되었던 점은 아버지 영조의 강한 요구와 기대, 확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도세자의 재능을 잘 살리지 못하고 소통이 부족했던 점도 큰 요인 중에 하나다. 영조는 신문고를 부활시키기도 하는등 애민정책을 펼친 명석한 군주였지만 좋은 아버지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사도세자를 진짜 괴물로 만든 것은 정치권력에 대한 갈망과 광기에 둘러싸인 노론과 소론세력이지 않을까? 사도세자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소론과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역모의 소지는 없었다. 게다가 1752년 사도세자가 등용한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들은 역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1728년 있었던 이인좌의 난(소론의 반란)을 반대하고 진압하는데 참여한 고마운 인물들이었다. 사도세자는 단순히 영조의 탕평을 따르며 정치적 조화를 꿈꿨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영조를 의심으로 내몰고 사도세자를 파멸에 가깝게 만든 진범은 권력에 눈이먼 노론세력들이었다,
이를 반증하는 모습은 훗날의 영조에게서 드러난다. 영조는 나경언이 거짓 고변을 실토한 이후 처분을 미루는 태도를 보였으며, 오히려 조사를 촉구하는 신하를 꾸짖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고 한다. 영조는 이 모든 것이 노론의 당쟁과 계략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음을, 나경언의 처벌은 단순한 화풀이에 불과했음을, 권력에 대한 노론의 갈망과 자신의 의심이 불러온 결말이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조정의 신하들을 보고 “부당 자당이 되었으니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역적이오!”라고 격분하였다고 한다.
오늘 날 우리의 사회도 간혹 정치인들의 자녀들이 특혜, 비리로 주목받는 모습을 보면 이러한 정치적 당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지금도 한국 어디선가는 제2의, 제3의 사도세자가 나타나고 있지는 않을까?
[참고문헌]
>다큐멘터리
*KBS 역사저널 그날, 한국사전 6회 「아버지의 눈물, 영조」, 2007-07-21 방송
*KBS 역사저널 그날, 한국사전 18회 「무인, 정조대왕」, 2007-10-27 방송
>사이트
*한국 위키피디아, 「조선 경종」, 2020-04-02 수정
*한국 위키피디아, 「조선 영조」, 2020-04-11 수정
*한국 위키피디아, 「조선 장조(사도세자)」, 2020-04-11 수정
*한국 위키피디아, 「붕당」, 2019-04-17 수정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