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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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터키의 문화유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위험도 많이 따랐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이를 셋으로 잘라 그 가운데 윗부분만 가져와 세웠다.
<오벨리스크 기단부의 부조>
<오벨리스크 기단부의 부조>
오벨리스크를 받치고 있는 기단 네 면에는 이것을 세울 당시의 조각품들이 있다. 이 작품들은 4세기 때의 조각수준과 작품 경향을 보여주는 귀중한 것들로 특히 현장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성소피아성당을 바라보는 동북쪽 면의 맨 아랫부분에는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작업을 그린 작품이 있고, 그 위로 테오도시오스 1세의 가족이 그 작업을 구경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 오른쪽 옆으로 북서쪽에는 무릎을 꿇은 야만인에게서 충성 서약을 받고 있는 네 명의 황제 가족이 보이며, 그 아래에는 그리스어로 이 오벨리스크를 어떻게 세우게 되었는지를 설명한 비문이 있다. 남서쪽 면에는 하단에 전차경기 모습이, 상단에는 이를 구경하는 황제 가족이 보인다. 그리고 끝으로 남동쪽 면에는 위쪽에 경기의 승리자에게 승리의 관을 씌워 주는 테오도시오스 1세의 모습이 있고, 그 아래에는 관람객들과 승리에 취해 춤추는 군중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맨 아래쪽에는 반대편에 그리스어로 쓴 것과 같은 내용의 라틴어 비문이 있다.
오벨리스크 뒤에는 뱀 세 마리가 서로 몸을 휘감아 올라가는 형상의 청동기둥이 있다. 이 기둥은 원래 신탁으로 유명한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앞에 있던 것인데 콘스탄티노스 대제가 330년, 자신의 새로운 수도를 장식하기 위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 기둥은 기원전 479년에 있었던 플라테이아 전투에서 31개의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이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것을 감사하기 위해 페르시아인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인 청동방패를 녹여 만들어 기원전 478년에 아폴론 신에게 바친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기둥의 밑 부분에는 31개의 도시 명칭이 새겨져 있다. 뱀 세 마리가 몸을 서로 꽉 휘감은 것은 그만큼 굳건한 단결을 상징하는 것이라 추정된다.
2) 콘스탄티노스 7세의 오벨리스크
히포드로모스 광장의 남쪽 끝에는 보기에도 흉물스러운 탑이 하나 있다.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예네토스(913~959) 황제의 오벨리스크로 알려진 탑이다. 콘스탄티노스 7세를 수식하는 포르피로에네토스란 낱말은 ‘자줏빛 옷을 입고 태어난’이란 뜻이다. 비잔티온에서 자줏빛 옷은 황족들만 입는 것이므로 그 의미는 ‘황태자로 태어난’이란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콘스탄티노스 7세는 913년, 여섯 살에 황제가 되어 32년 동안이나 여러 사람들의 섭정을 받다가 나이 서른일곱이 된 945년에야 통치권을 행사한 기구한 운명의 황제다. 그는 몇몇 뛰어난 황제들과 더불어 비잔티온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의 치하에서 비잔티온 제국의 교양과 학문이 극도로 발달했고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끌어올렸으며 대외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정치가보다는 문필가로 더 강한 성향을 드러낸 교양인이었기에 무너져 가던 이 탑을 대대적으로 수리한 듯하다.
이 탑은 원래 콘스탄티노스 대제 때인 4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콘스탄티노스 7세 당시에 상당히 훼손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탑을 수리한 뒤에 그곳에 자신의 명문을 남겼는데 이 때문에 이 탑이 그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원래 이 탑은 32미터 높이의 대리석에 금박 청동 장식물을 입힌 아름다운 기둥이었다. 하지만 청동은 제4차십자군이 무기를 만들기 위해 떼어냈고 그것을 붙였던 자리만 흉하게 남은 것이다. 이 탑의 흉물스러움은 제4차 십자군이 저지른 만행과 그 비극적이고 참담한 결과를 새삼 느끼게 해 준다.
3) 빌헬름 2세의 정자
히포드로모스 광장의 북동쪽에는 아름다운 정자 모양의 건물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인 독일 빌헬름 2세(1888~1918)가 1901년 자신의 터키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이 정자를 지어 술탄에게 기증했다. 터키어로는 알만 체스메라고 불리는 이 정자에는 가운데에 샘이 잇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 샘의 물을 마실 수 있었는데 당시 동네사람들은 물맛이 좋다며 이곳 물을 길어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입구가 굳게 잠겨 있다.
8. 보스포러스 해협
보스포러스 해협은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잇고,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터키의 해협이다. 길이는 30 km이며, 폭은 가장 좁은 곳이 750 m이다. 깊이는 36m에서 120 m 사이 이다.
해협 양쪽으로 이스탄불 시가 자리잡고 있다. 해협을 횡단하는 두 개의 다리가 건설되어 있으며, 2008년을 목표로 바다 아래로 기차 터널을 건설하고 있으며 한국의 SK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이 2층 구조의 자동차 도로 공사를 시작하였다. 5.4Km의 거리이며 2016년에 완공될 것으로 예상된다.
흑해의 입구에 위치하고 에게해와 통하는 해협으로 중간부에 있는 마르마라해(海)를 포함하여 콘스탄티노플해협으로 총칭한다. 이 해협은 해협 제도에 관한 조약(1936. 11. 9)에 의해 국제화되었다. 조약은 모든 외국의 상선에 평시, 전시(戰時)를 불문하고 완전한 통항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터키가 교전국인 경우에는 적국 선상의 통항을 금지할 수 있다. 군함에 관해서는 흑해 연안국과 비흑해 연안국, 전시와 평시 및 함(艦)의 종류, 톤 수, 척 수 등에 따라 취급을 구별하고 있다.
(1) 평시에는 (a) 모든 외국의 군함은 총 톤 수 15,000톤과 총 척수 9척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해협의 통항이 인정된다. (b) 그러나 흑해 연안국의 주력함은 톤 수의 제한 없이 개인함으로 해협을 통항할 수 있다. (c) 잠수함은 흑해 연안국이 소유하는 것에 한하고, 주간, 개인함으로 부상항행을 조건으로 해협의 통항이 인정된다. (2) 전시에는 (a) 터키가 비교전국인 경우에는 평시와 동일한 취급이 이루어지지만 교전국 군함의 통항 은 금지된다. (b) 터키가 교전국인 경우에는 외국 군함의 통항을 허가할 것인지, 금지할 것인지는 모두 터키정부의 재량에 맡긴다. 터키가 전쟁의 위험에 위협을 받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 다. 또한 교전국 군함은 해협에 있어서 나포, 임검(臨檢)의 권리를 행사하고 또한 어떠 한 적대행위를 하는 것도 금지된다.
* 보스포러스 해협 크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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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50페이지
  • 등록일2024.02.28
  • 저작시기2024.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24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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