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를 전체를 꿰뚫는다 (사마천을 해부해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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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장의 둘째아들로 5초7국의 난 때 한나라를 지켜 황제에게 상을 받았으나 그의 아들 사(賜)가 반역을 꾀하여 멸족당하였다. 循吏列傳 순리란 법을 잘 지키고 청빈한 관리란 뜻으로, 이편에 수록된 순리 5명은 모두 선진 때의 관리들이다.
초의 손숙오(孫叔敖), 정의 子産, 노의 公儀休, 초의 재상 石奢, 그리고 晉나라 문공 때의 옥관 李離등 5명이다. 汲·鄭列傳 한 무제때에 구경을 지낸 급암과 정당시에 대한 기록이다. 두 사람 모두 청렴하고 직간을 잘하여 한자리에 오래 붙어있질 못했다. 급암은 자가 長孺이며 품행이 바르고 직간하기를 좋아하여 황제 앞에서 황제가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만 인의를 베푼다고 직언할 정도다. 정당시는 자가 莊이며 협객을 자처하여 남을 대하는데 공평하고 베풀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벼슬을 잃자 빈객들이 모두 떨어져 나간 세태를 사마천은 꼬집고 있다. .儒林列傳 유학의 발전사와 전승관계를 유림 53명에 통해 기술하고 있다. 그 중 39명이 한무제 때 인물이다. 사마천 자신이 춘추사상에 바탕을 둔 황로 사상을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림 중 공손홍과 동중서를 비중있게 서술했다. 酷吏列傳 한나라 초기의 포학한 관리 12명의 혹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 중 10명이 무제 때의 인물이다. 사마천이 순리열전을 기록하고 이어 혹리들을 서술한 것은 그가 예의와 도의를 중시여기고 폭정에 반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서두에 공자와 노자의 인의정치를 인용하고 있다. 大宛列傳 대원은 서역지역으로 중국과의 교역으로 중국통일과 경제발전에 도움을 준 대원,대월지,대하,강거등의 서역지방에 대한 풍속과 장건의 교류과정을 상세히 열거하고 있다. 遊협列傳 본래 의협은 춘추전국시대에 출현했던 부류로 사마천은 비록 정의에 부합되지 않더라도 자신을 희생하며 말과 행동에 믿음이 있어 댓가를 바라지 않고 다른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의협이라 보고 있다. 사마천은 봉건적 질서와 도덕을 중시하면서도 불의에 맞서 목숨을 바쳐가며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서민협객의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 사마천은 의협 곽해의 행적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면서 멸족된 것에 대해 애석해 하고 있다. 영幸列傳 황제곁에 붙어 아부로 영달을 꾀하던 환관과 외척등 권력 주변인물들의 속성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부침은 오로지 최고 권력자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으니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이연년이 그러했고, 미자하가 그러했다. 사마천은 백세 후에도 그런 운명을 가진 자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라 단언했다. 滑稽列傳 사마천은 기지와 해학이 넘치는 인물까지 골라 열전에 포함시켰다. 이들은 대부분 왜소하고 볼품없으며 지위도 없지만, 말 재주와 풍자가 뛰어나 여러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웃겼다. 순우곤, 우맹, 우전등 세사람의 열전이다. 日者列傳 日者는 길흉을 점치는 易者로, 제왕 곁에 있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였다. 과학이 일천했던 옛날에는 천지와 일월성신의 운행에 국사를 의지할 정도로 이들의 역할은 중요했다. 龜策列傳 이 편은 앞의 일자열전의 자매를 이루는 편으로 거북껍질로 점을 치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우주의 순행과 자연의 변화와 이치에 순응하는 세계관이 있어 점술가와 태복이라는 직업이 생겨났고 세습했다. 문장이 조잡하여 후세에 보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貨殖列傳 화식(貨殖)은 글자 그대로 재산을 늘리는 것으로 당시에 의식주가 경제생활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춘추 말기부터 한라 초까지 상업으로 치부한 사람들의 활동을 기록한 것이다. 사마천은 부를 얻는데는 상업이 최상이고 부유해지는데는 직업의 귀천이 없다고 하면서도 범려같이 깨끗하게 돈을 벌어 가난한 사람과 주위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부자의 상도를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부유하면 그 덕을 행한다(富好行其德者) 는 것이다. 太史公自序 태사공자서는 열전의 맨 마지막에 놓여 있지만 사기 전체에 대한 서문이다. 사기 130편에 대한 간단한 해제가 붙어 있고 집필의 동기와 구성 체제를 적기하고 그가 궁형을 받고 사기를 집필하게된 동기등이 포함되어 있다. 자서편은 크게 7단계로 서술되어 있고 명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사기』를 읽어보면 그 글자 한자 한자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에 넘친다. 그의 천재적인 표현의 재능도 뒤따랐지만 천하를 주유하면서 그 지방의 인정, 지세, 풍속에 밝게 탐문한 결과 때문일 것이다. 사료를 취사선택하는 경우에서도 이성으로 판단되어 상식적이면서 또 이해되는 사실에만 기초를 두었기 때문에 <사기>는 더욱 역사서로서의 냉철한 객관성이 높이 평가되는 터이다. 동양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서양에서조차 <사기>를 불후의 명저로 관심을 끄는 이유는 있다. 그것은 세계에서 최초로 나타난 종합적인 통사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 동안 기껏 단대사가 고작이었고, 서양의 헤로도토스의 <역사>조차도 개설 형식만을 취하고 있음에 비한다면 <사기>의 사마천이 단연 '역사의 아버지'로 존중되는 점에 이의는 없을 것이다. 그 당시 문학이 성행했으나 문학적 가치에 있어서도 <사기>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인생의 목적을 현세에서 누리는 부귀영화에만 있다고 그는 보지 않았다. 육체가 썩어 없어진 후에라도 명예로운 이름이 영원히 남게 되는 그 '불후의 명성'에서 그는 구원을 찾았다. 오늘날 중국의 문화나 중국인의 행동지침에서 '인고의 정신구조'가 많이 나타남은 사마천에서 본받을 바가 클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후의 명저, 『사기』를 읽고 한번 글을 적어 본 게 끝나게 되었다. 위에서 다룬 내용은 사실 <사기>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사마천이 후세에 남기고자 한 뜻은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전달됐다고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사마천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후대에 전하고자 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껏 살펴보았듯이 <사기>는 인간들이 펼쳐 보일 수 있는 모든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을 읽는 우리들 또한 그 내용에 어느 때는 감동하고 흥분하며, 분노하기도 하고 가슴에 새겨두기도 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이 사마천이 2,000년 전에 우리에게 남기고자 한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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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2.01.02
  • 저작시기2002.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0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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