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에 관한 이야기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한반도의 절반을 통치하고 있는 북한 최고권력자 김정일.

2.잘못 알려진 김총비서의 실체

3.정확하고 솔직한 보고 좋아해

4.재혼한 처와 의암동 사택에 거주

5.김정일 부인 모습 드러낼까?

6.정치위원 맡으며 통치체제 구축

7.성격 두고 평가 엇갈려

8.아버지 의식 대외활동 의도적으로 기피

9.‘인민적’ 이미지 창출에 특히 신경

10.선호하는 ‘밀실정치’와 그 측근들

11.경제난 해결 위해 실무형 중용

12.‘경제총사령관’ 이미지 변신 시도

본문내용

김총비서는 지난 4월 이들 군 최고 실세들을 모두 대동하고 평양에 있는 군 자동화대학을 방문해 군부의 지지가 확고함을 과시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김총비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온 김형철 책임부관과 군부대 방문 때 호위임무를 전담하는 원응희 군 보위사령관도 빼놓을 수 없는 측근이다.
이렇게 김총비서가 당과 군의 일부 간부들만 데리고 다니는 것을 ‘측근정치’ ‘밀실정치’라고만 볼 수 없는 측면도 존재한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체제위기에 봉착하자 김총비서는 즉각 ‘비상관리체제’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대를 비롯, 지방 현지지도를 나갈 때면 당·군·대남분야의 현안을 그때그때 보고받고 즉각적으로 결정사항을 지시하기 위해서는 이 분야의 최고담당자들을 항상 동행해야 하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김정일시대’를 이끌어 나갈 북한의 파워엘리트들은 지난 1998년 9월5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회의에서 단행된 권력구조 개편과 인사조치를 통해 가시화됐다. 이 회의에서 북한은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제를 폐지하고 김총비서를 국방위원장에 재추대함으로써 권력승계를 공식 마무리했다.
경제난 해결 위해 실무형 중용
권력구조면에서 주목할 점은 ‘권력의 분산과 이중성’을 기했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김총비서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돼 있으면서도 제도상으로는 대외적 국가수반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국내 행정 전반의 최고책임자인 내각 총리 등으로 권력을 분산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한마디로 국방은 국방위원회가, 외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내정은 내각이 맡는 권력분산이 이뤄졌다. 국가기관의 개편에 따라 대대적인 인사이동도 뒤따랐다. 먼저 최고 권력기관으로 부상한 국방위원회는 위원장에 김정일, 제1부위원장 조명록, 부위원장 김일철·이용무가 선출됐다. 위원에는 김영춘, 연형묵(자강도당 책임비서) , 이을설(호위사령관) 원수, 백학림(인민보안상) 차수, 전병호 비서, 김철만 차수가 임명됐다.
최고인민회의 의장에는 최태복 비서, 부의장에는 장철(전 부총리) 과 여연구(전 교육위원회 부위원장) 가 선출됐다. 대외적으로 국가수반 역할을 맡게 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는 김영남(전 부총리 겸 외교부장) , 부위원장에는 양형섭(전 최고인민회의 의장) 과 김영대(사회민주당 중앙위원) , 서기장에는 김윤혁(전 부총리) 이 각각 선출됐다.
과거 정무원은 내각으로 개편되면서 권한이 확대되고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경제분야 32개 부서를 23개(후에 2개 부서 신설) 로 통폐합했다. 실무 전문관료를 중심으로 진용이 짜여진 ‘경제내각’의 성격이 뚜렷하다. 관심을 모았던 내각 총리에는 홍성남 부총리가 승진했다. 부총리에는 채취공업부장 조창덕과 기계공업부장 곽범기가 승진, 임명됐다. 두사람은 각각 탄광과 공장의 노동자로 출발해 기사·직장장·기사장·지배인을 거쳐 정무원 부장으로 발탁됐다가 부총리로 승진한 입지전적 인물들이다.
김총비서는 인사조치를 통해 점진적인 세대교체를 이뤄냈다. 김총비서는 1970년대 중반 이래 ‘간부배합’정책을 중시해 노년­중년­청년의 배합, 빨치산 출신-혁명유자녀 출신­비유자녀 출신의 배합 등을 기본틀로 삼아왔다. 이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전문성 있는 관료들로 물갈이를 단행한 것이다.
혁명1세대들은 백학림·이을설 등 몇명을 제외하고는 명예직을 맡아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대중단체들의 책임자들은 70대에서 50∼60대로 전원 교체돼 10년 이상 젊어졌다. 특히 김정일은 당과 군에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의 ‘빨치산 2세대’들을 중용했고, 내각에는 경제난 해결을 위해 전문지식이 있는 ‘실무형’으로 교체했다.
그중에서도 조직지도부 인맥의 급부상이 눈에 띈다. 최근 몇년 사이 도당 책임비서로 임명된 김운기(황해남도) ·김평해(평안북도) ·이수길(양강도) ·리태남(함경남도) 등은 김정일이 1964년 조직지도부에 들어갔을 때 보조지도원으로 당에 들어와 그를 보좌했던 직계들이다. 1996년 이래 심각해진 식량난 이후 흐트러진 지방당조직을 확고하게 장악하겠다는 김정일의 의도가 엿보인다.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제1비서에 임명된 이일환은 ‘빨치산 3세대’(빨치산 김명화의 외손자) 의 선두주자로 향후 북한의 후계구도와 관련, 주목되는 인물이다.
권력구조 개편과 인사조치를 단행한 직후 김총비서는 ‘강성대국 건설’을 내세우며 대대적으로 ‘경제살리기’에 나섰다. 1998년 10월10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당창건 53년을 기념하는 사설에서 북한이 ‘사상과 군사의 강국’으로 자라났다면서 앞으로는 ‘경제의 강국 건설’에 주력하겠다는 방침을 내비쳤다.
‘경제총사령관’ 이미지 변신 시도
이보다 앞선 10월1일 김총비서는 양강도 대홍단군 현지지도를 통해 대홍단군의 주요 농작물인 감자 농사, 축산업, 농업기계화, 국토관리 부문 등 경제분야에서 이례적으로 구체적인 지시를 했다. 이후 김총비서는 군부대 방문을 꾸준히 지속하면서도 자강도·강원도·평안북도·함경북도 지역의 경제부문을 직접 방문해 전력과 식량 증산을 독려했다. 인민군 총사령관에서 ‘경제총사령관’으로의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월 첫 현지지도 장소로 국가과학원을 방문한 것도 과학기술 입국과 경제회생에 쏟고 있는 김총비서의 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김총비서가 ‘살아남기’에서 ‘잘 살아보세’로 정책을 전환하고 있다는 징후가 북한 전사회적으로 파급되고 있다. 해외자본을 적극 유치하기 위해 나진·선봉지구에 이어 조만간 신의주·남포지역을 경제특구로 선포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호응해온 데서도 경제 재건을 위한 북한의 실리추구를 잘 읽을 수 있다.
북한은 당과 국가보다 김정일 총비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체제다. 그만큼 김총비서의 지시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북한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는 김총비서의 변화가 곧 북한사회 전체의 변화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김총비서와 북한이 전면적인 개방정책으로 나올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그런 점에서 김총비서 탐구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키워드

  • 가격2,3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2.01.02
  • 저작시기2002.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088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