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2. 역사와 운동

3. 동유럽사회주의 체제

4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의 원인

본문내용

지만, 소련은 동유럽의 정치, 경제제도에 강하게 간섭하지 않았다.
전환기는 1947-1948년에 찾아왔다. 1947년 봄 이래 미국의 트루만 독트린, 마샬플랜의 발표, 이에 대한 9월의 코민포름(공산당정보국)결성은 냉전을 본격화시켰다. 그리고 1948년 6월, 유고슬라비아의 코민포름 추방이라는 시간을 거쳐 1948년 후반부터 동구 제국의 정치, 경제 제도는 소련적인 것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군사적 지배하에 공산당이 일당독재를 행하고, 당이 국가를 지배하고, 공업화가 추진되었다. 다른 정치 논리는 배제되었고 그 논리를 가진 자는 숙청되었다.
이것은 소련에서 1930년대 스탈린이 수립한 체제로서 스탈린형 사회주의라 불려지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유고슬라비아에서는 1950년대에 노동자의 기업자주관리와 비동맹정책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체제가 세워졌다.
스탈린형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1956년에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나타났다. 1956년 2월에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평화공존과 사회주의로의 다양한 길이라는 원칙이 승인되어 스탈린 비판이 이루어지자 그것은 동유럽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로인해,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의 노동자의거가 일어났고, 이 의거는 폴란드 특유의 자유로운 정치상황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고, 헝가리에서는 폴란드의 움직임에 자극받아 10월에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나 정치적 자유를 요구했다. 새로 탄생한 나지 정권은 복수정당제를 도입하고 경제 정책을 개선하는 등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나지 정권은 바르샤바조약기구에서 탈퇴를 선언하는 급격하고 비현실적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소련의 결정적 군사개입을 초래하며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1964년 루마니아의 자주노선선언 등 일련의 반소련 또는 반사회주의 사건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사회주의 비판의 흐름은 중, 소 대립의 와중에서 동유럽 전체의 경제개혁을 초래했다. 1965년경부터 동유럽 각국은 계획경제의 틀 속에서 각 기어에 일정한 정도의 자율성을 부여해 이윤창출을 인정하는 개혁을 도입했다. 그 속에서 더욱이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이 고조되어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시기를 맞게 되었다. 지식인과 공산당 개혁파가 주도한 프라하 봄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여름 무렵 바르샤바조약기구 군대에 의해 진압되고 개혁은 좌절되었다.
1968년부터 1980년까지 많은 동유럽에서는 동서의 긴장 부활과 석유위기,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이 사회주의 체제를 떠받치며 개혁이 크게 후퇴하고 말았다.
4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의 원인
첫째, 무엇보다도 우선 스탈린형 사회주의는 동구에서 볼 때 외부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1930년대 소련에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1949년 이후 동구에 도입된 것이다. 그것은 소련과의 역사적 조건이 전혀 다른 곳에 도입된 것이다. 농업 조건도, 공업 발전 수준도 달랐다. 따라서, 그것은 뒤에서 살펴보듯이 일정한 의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동구 토착사회 위에 씌워져 그 일부와 융합하면서도 많은 경우 이와 대립하고 이것을 지배해왔던 것이다.
또한 이 스탈린형 사회주의를 도입한 공산당도 동구에서는 오랫동안 소련에 망명해서 전후에 귀국한 공산당원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2차대전 전부터 2차대전 기간중 동구사회 속에서 비합법 활동을 하고 그 주민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던 공산당원은 1949년 이후 소련의 민족주의 탄압속에 민족주의자로 낙인찍혀 숙청되었다. 이러한 위화감은 1980년대에 들어와 국민의 자각이 높아지자 점점 강해졌던 것이다.
둘째로, 스탈린형 사회주의는 1960년대까지 생산력향상을 달성했다. 농업에서도 공업에서도 적어도 양적인 생산력향상은 실현되었다. 전전의 어려운 생활에 비해서 동구사람들의 생활은 확실히 개선되었다. 전전에 800만 인구 중 300만명이 걸식을 했다는 헝가리의 가난한 농촌의 경우 1960년대말까지는 헝가리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이 사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양적 생산력 향상 때문에 사람들이 이번에는 질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은 세련된 자수 블라우스를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스탈린형 계획경제에서는 주민의 세세한 수요를 맞추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경제운용방식을 개혁해야했다.이러한 시도는 1960년대후반부터 시작되었지만 중도에 좌절되었다.
셋째, 약간 의외일 수 있지만 1960년대부터 추진된 동서교류라는 요소를 들 수 있다. 대개 중,소 대립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1960년대부터 동서 교류는 상당히 진전되고 있었다. 경제와 정치수준에서의 교류는 아니었지만 문화적 교류를 통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상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넷째, 1970년대의 세계적인 경제위기에 동유럽의 구체제가 적응하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다. 이위기의 시기에 스탈린형 사회주의는 세계 경제의 주류로부터 결정적으로 뒤떨어지게 되었다. 고도 첨단 기술의 개발과 도입에서 뒤쳐진 것이다. 처음에 동유럽은 석유산출국에 대한 수출에 기대를 걸었는데 석유산출국 자체가 마침내 경제위기에 빠지자 동유럽은는 서유럽 시장에 의존하는 방향을 택했다. 그러나 동유럽의 주요한 수풀품인 농산물의 수출경쟁력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수구의 농업보호정책이 영향을 미쳐 수출은 늘지 않고, 고도 첨단 기술의 수입에 따른 국제수지의 악화가 누적되었다.
다섯째로 1970년대 후반부터 소련의 영향력 약화이다. 동유럽은 경제 및 문화에 있어서 어느 정도 서방지향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냉전시대의 소련의 대미전략등으로 인하여 많은 제약을 받았다. 또한,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지 않으면서 소련의 주는 경제적 특혜를 받았다. 이러한 결과, 동구의 소련의존은 소련의 부담이 되었고, 동구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소련이 치렀던 경제적 손실은 실로 엄청났으며, 결국 소련 스스로도 경제적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소련을 발전모델로 하면서도 동유럽 국가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발전전략의 차이는 소련이탈을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소련의 영향력 약화는 억눌려 있었던 동유럽특유의 민족주의와 전통적 가치들이 다시 되살아나게 되었다.

키워드

  • 가격1,3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2.01.24
  • 저작시기2002.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106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