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발생의 사회적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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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서론

1.동학의 발생과 발전

2.동학발생의 사회적 배경

3.동학 농민 전쟁의 성격

4.동학농민운동의 지향점

5.동학농민 전쟁의 결과 및 의의

6.결론

본문내용

칭하였다. 그 아버지 孟哲은 先鋒大將, 그 동생 應觀과 季觀, 從弟 汗觀은 각각 接主라 칭하였다. 갑오년 3월 무장 新村 등지에서 기포하여 백산 황룡 전주성전투를 거쳐 고부 고창 무장 남평 등읍의 군기를 취하였다. 倡優 巫夫의 무리가 모두 그 黨에 들어갔고 또 屠漢輩들을 불러모아 接을 이루었는데, 그 세력이 크게 된 후에는 양반 평민도 마구 몰아넣어 10만 대군을 이루었다. 모든 우두머리 가운데 으뜸을 칭했고, 매번 손화중의 선봉이 되었다." 金道順은 "才人으로서 접주를 지냈는데, 그 무리를 이끌고 양반들을 포박.구타하고 노략질한 것이 심했다."
셋째, 무력적 우위를 바탕으로 고창일대에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우선 농민군 지도자가 방곡령을 내려 미곡유출 방지 활동을 벌인 사례가 확인된다. 다음은 쌀을 매입하기 위해 4월 27일 흥덕사포에 도착한 일본인의 보고문이다. '...5월 28일밤 동도의 접주 한 사람이 그 수하인 30명 정도를 인솔하고 여사에 와서 사들인 쌀의 유무를 묻기에 있다고만 말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현재 이곳 근방의 미가의 폭등을 초래한 것은 해외수출이 심히 많은데서 연유한다. 그러므로 너희들 일본인들이 이 내지까지 들어와서 미곡을 매집하면 토착민들이 졸지에 기근으로 죽을 지경이 된다. 따라서 금일부터 방곡을 엄행하게 될 것이므로 작합도 실어내지 못한다"는 뜻을 말했기 때문에, 나는...방곡령은 어느 곳에서 발포한 것인지 또 영문이 있는지 반문하였다. 그랬더니 그는 회중에서 한통의 공문같은 것을 끄집어내면서 동학당의 수령으로부터 발령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申俊植은 "흥덕현에 있는 明禮宮畓의 賭租 50여석을 임의로 방매하였다"는 데서 보듯이, 관토를 몰수하여 임의로 처분한 사례도 확인된다.
넷째, 이들은 고창일대를 넘어 인근 지역까지 진출하여 활동했다. "5월말경 무장 농민군 부안에 들어와 무덤을 파헤치고 민가를 부수며 作梗하였다"거나 "7월 진도 출신 박중신이 영광과 무장에서 무리를 모아 배를 타고 진도에 들어가 성을 공격하고 군기를 빼앗고 민가에 불을 질렀고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했다"는 기록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또 영광일대의 경우, 손화중의 휘하인 송문수가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창일대 농민군은 5월 이후 9월 재봉기 전까지, 이 지역의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한 가운데 강도높은 신분투쟁과 대부민투쟁을 전개했고, 고창일대를 넘어 부안 진도 영광 등 인근 지역에 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이 일제를 쫓아내기 위해 9월12일 재기하여 그 해 12월 체포되기까지의 단계를 제2차 기포 또는 제2차동학농민전쟁이라고 부른다. 제2차기포를 위해 전봉준은 9월 초부터 삼례를 거점으로 동학농민군을 재조직한 뒤 10월에 서울을 향해 북상하였다. 이때 서울에서는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경군과 일본군이 세 갈래 길로 내려오기 시작하고, 전국 각 지역에서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잇따랐다. 제1차 무장기포단계에서 봉기하지 않은 충청도·강원도·경기도·경상도 북부지방에서도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반침략항쟁의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 봉기하였다. 최시형의 영향 아래에 있던 동학 상층지도자들도 휘하교도들을 이끌고 봉기하여 10월14일경에 논산의 전봉준과 합류하였다. 이들 연합군은 공주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고, 서울로부터 내려온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10월23일부터 25일까지 1차 대접전이 있었고, 11월8일까지 제2차 우금치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 두 차례의 대혈전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선전분투했던 동학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동학농민전쟁이 좌절되고 난 뒤, 봉기의 대열에 참가했던 지도자들과 민중들은 재지유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보군과 관군, 일본군에 의해 철저하게 진압되었다.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대체로 반봉건·반침략투쟁이었다는 점에 연구들의 견해가 일치되고 있다. 농민전쟁의 전개과정에 따라 단계를 구분해보자면 제1단계 고부민란, 제2단계 제1차동학농민전쟁, 제3단계 전주화약과 집강소시기, 제4단계 제2차동학농민전쟁. 그리고 고부민란 단계에서부터 제1차 동학농민전쟁까지는 주로 반봉건투쟁의 성격을, 제2단계 동학농민전쟁기부터는 반침략적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고 본다.
● 결 론
동학농민운동은 사회적으로는 신분타파운동을 벌여 양반질서를 혁파하고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하고, 경제적으로는 조세 수취제도의 개선 등을 통해 지주중심의 구조를 혁파하고 영세한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등 직접생산자들의 자립과 발전을 꿈꾸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체제의 개선을 희망했다. 한마디로 '사회개혁과 외세침탈 배격 = 자주 근대화(반봉건 반외세)'를 이루려 한 농민들의 항쟁이었지만 실패한 혁명이라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광무년간의 사회개혁 및 항일운동, 의병전쟁, 3ㆍ1만세운동, 상해임시정부, 광복군 활동 등 농민운동 이후에 전개되는 숱한 민족운동의 조직적, 이념적 수원지였다. 18세에 동학접주가 되어 이듬해 황해도 해주 농민군의 선봉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일본인 밀정 살해, 신민회 및 상해 임시정부 활동, 광복군 조직 등 민족지도자의 길을 걸은 백범 김구의 생애가 이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현대에 전개된 민주화 운동, 즉 4.19의거, 5.18 광주민주화항쟁 등의 정신적 본령을 이룬다. 이러 점에서 농민운동은 끝내 실패로 마무리된 사건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제대로 수용되지 못할 때, 부패한 지배세력이나 노골적인 외세침략에 대한 대중적 비판과 저항이 미약할 때, 그 공동체가 어떤 처지로 전락하는지를 현재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산 경험이자 역사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한우근, <동학농민봉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신순철ㆍ이진영,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서경문화사, 1998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근대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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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4.25
  • 저작시기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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