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관해.여러개 중 두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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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자연

2. 주민

3. 역사

4. 정치

5. 경제

6. 사회

7. 문화

8. 과학기술

9. 대한관계
1) 근세 이전
2) 최근세
3) 교류관계

본문내용

월에 1·2차 한·중 외무장관 회담이 이루어졌다. 1992년 2월에 양국 무역협정이, 그리고 7월에는 투자보장협정(投資保障協定)이 발효되었다. 그해 4월에는 3차 외무장관 회담이 이루어졌고 8월 24일 양국은 수교의정서(修交議定書)를 교환하고 정식 수교를 이루고 민간 차원의 교류에서 정식적 국가 간의 교류로 바뀌었다.
1992년 9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 리펑 총리, 장쩌민 총서기와 회담을 가졌다. 그 일정 중에 한·중 통상장관회의를 열어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에 대한 세제지원(稅制支援)과 8차 5개년 계획에 한국기업의 참여를 요청하였다. 1993년 5월에는 첸치전[錢其針] 외교부장이 방한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 시애틀에서 정상회담을 가져 북한 핵문제와 다각적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하였다. 1994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북한 핵문제의 대화를 통한 해결과 긴밀한 협의, 한반도 비핵화 실현 지지를 논의하고 이중과세(二重課稅) 방지협정 및 문화협정을 체결하고 통신협력양해각서(通信協力諒解覺書)를 교환하였으며 산업협력위원회(産業協力委員會)를 설치할 것을 합의하였다. 10월에는 리펑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12월에는 한·중 양국의 최대 현안 중의 하나인 서울~베이징 간의 직항노선이 개설되었다. 1995년 10월 장쩌민 국가주석이 방한하였고 1998년 11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였다.
1995년 2월 17일 북한에 대한 경수로제공을 전담할 다국적 컨소시엄인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 참여문제와 관련 불참키로 결정함으로써 한반도 문제에 대한 역할을 스스로 제한하였다.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해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대북한제재에는 반대하였다. 중국은 1997년 4자회담 참여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8월 뉴욕 4자회담 예비회담과 12월 제네바 본회담에 참가하였다. 중국은 최근 들어 한국의 대북(對北) 포용정책과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 화해·교류 및 협력관계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하고, 한반도 평화·안정을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3) 교류관계
개혁·개방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과 중국간의 교역은 20억 달러 미만이었다. 1991년 중국의 경기회복으로 교역액은 44억 달러까지 이르렀고, 양국 무역대표사무소 설치와 무역협정 체결 등으로 경제교류가 본격화되면서 급격한 증가 현상을 보였다. 1993년에는 90억 8000만 달러로 늘었다. 무역수지를 보면 한국은 계속 적자를 기록하다가 1993년도에 들어서 대중국 수출이 51억 5000만 달러로 전년도에 비해 94%의 증가율을 기록하고, 수입이 39억 3,000 만 달러로 증가율 5%에 그쳐 12억 20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1994년도 들어 수출 증가세가 둔화되고 중국의 수입억제로 상반기 무역수지는 3억 30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총 무역액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1989년의 1.7%에서 1993년도에는 5.5%를 차지하여 중국이 미국·일본에 이은 한국의 제3대 교역 상대국으로 부상하였다. 교역 품목의 구조는 전형적인 산업간 분업형태를 보인다. 즉 대중국 수출은 중화학 공업제품이 중심이 되어 있어 철강·금속제품, 기계류 및 운반용 기계, 섬유, 화공제품 순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입은 농수산물, 섬유류, 광산물 등의 품목이 대종을 이룬다.
정식수교와 한국의 산업구조조정(産業構造調整) 등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여 중국이 한국의 2대 투자대상국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1985년 홍콩을 통한 우회적인 투자가 시작된 후 1989년 9건, 1990년 35건에서 1991년 107건으로 급속히 늘었고, 1993년에는 630건 5억 7,030만 달러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93년까지의 직접투자 누계는 1,043건 10억 430만 달러에 달하였다. 1998년에는 191건 1억 1100만 달러로 줄었으나 2000년에는 415건 2억 300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수교 후 초기에는 투자 대상지역이 보하이만[渤海灣] 주변과 둥베이3성(東北三省)에 편중되었으나 최근에는 상하이·장쑤성[江蘇省]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교역 확대를 위해 중국의 공업화에 소요되는 자본재의 확대와 소비변화에 부응하는 시장개척을 중시하고 있으며, 경쟁력이 약화된 업종의 투자를 조장하고 중국의 전략육성산업이면서 협력 가능성이 높은 항공기, 자동차, 전자교환기(TDX), 원자력발전 등을 우선 협력분야로 선정하여 산업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과는 1970년대까지 줄곧 밀접한 관계와 지원을 해왔다. 그러나 1978년 이후 개혁·개방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 변화로 북한과도 일정거리를 유지하는 선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1992년까지도 북한과의 돈독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1989년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중국을 방문하고 장쩌민 총서기가 1990년 3월 평양을 방문해 한국과의 경제적 교류로 소원해진 관계를 재차 긴밀한 관계로 바꾸려고 하였다. 그러나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정식 수교하면서 급속도로 관계가 소원해져 1993년 3월 예정되어 있던 김정일(金正日)의 중국 방문이 취소되었다. 1992년 12월 중국이 북한에 대해 경화결제(硬貨決濟) 요구에 따라 더욱 그 관계가 냉각되었지만 북한 핵문제와 경제난이 가중되어 북한이 중국에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관계개선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1993년 7월 북한의 ‘승전 40주년’ 행사에 중국 대표단이 방북하였고 중국의 경제인들도 활발한 활동을 벌여, 중국이 북한의 최대 교역국으로 올라서게 되는 등 여전히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크다. 1996년 8월 북경에서 한중 어업협정 체결을 위한 실무회담을 개최하였다. 2000년 현재 한국은 일본·미국·홍콩에 이어 중국의 4번째 교역국으로, 대한(對韓) 수입은 186억 1000만 달러, 수출은 128억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화학공업제품, 섬유, 전자 및 기기, 철강, 금속제품 등의 공업용 원부자재 등이고 주요 수출품은 철강, 금속, 섬유, 전자 및 기기, 농림수산품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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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4.27
  • 저작시기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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