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서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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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며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19세기 후반의 미술과 유럽사회
구조와 구성의 복귀 : 쇠라와 세잔느
내면 세계의 표현 : 반 고흐와 고갱
미지의 영역 추구 : 상징주의 미술과 세기말 회화
미술과 생활의 만남 : 나비파와 아르 누보

본문내용

. 이들은 자신들의 미술이 과거의 종교의 기능을 대신한다는 의미에서 나비(Les Nabis)라고 명명했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의미한다. 나비파의 멤버는 부유한 중산층 출신들로서 고갱의 순수 색채에서도 영향을 받았지만 광범위한 관심사와 절충주의적 태도를 가졌던 지성파 화가들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고갱의 추종자로 남아 있기보다는 여러 종류의 영향을 수용하였다. 특히 나비파들은 당시의 미술 경향 중에서도 상징주의 경향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나비파들은 카톨릭 신자였으나 신비주의에 빠져 있었으며, 장미십자회, 신지학, 불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플라톤, 베르그송, 쇼펜하우어뿐 아니라 문학, 음악 등 문화 전반에 대해 토론을 즐겼다. 이들은 사실주의나 인상주의 작품에 나타난, 현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실증주의를 배척하고, 초기 기독교, 비잔틴, 이집트 미술의 신성함을 찬양하였다. 나비파의 이론가로 등장한 모리스 드니는 1890년 「신 전통주의의 정의 D finition du N o-Traditionnisme」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그림이란 그것이 전쟁터의 말이나 누드 여인, 또는 일화적인 것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일정한 질서에 의해 배열된 표면"이라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으면 이는 20세기 미술의 방향을 예고한 것이 되었다.
나비파들의 중요한 역할의 하나는 이들이 순수미술 외에 응용미술 분야에 참여하였다는 데에 있다. 이는 이젤회화보다 장식회화를 더 우월하게 생각하며 미술을 생활 속에 끌어들이려고 한 그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한편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이 사회적 고립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한데 주로 순수미술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모더니즘이 응용미술에도 실험되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다. 나비파들은 상징주의 문학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책의 삽화나 무대 배경과 프로그램의 표지를 맡았으며 진보적 미술 잡지들에 일러스트레이션을 싣기도 하였다. 나비파가 실제 응용미술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파리가 산업 도시의 중심이 되면서 일반 사람들의 생활이 현대적 문화시설을 이용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거기에 걸맞는 현대적 디자인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90년대의 파리는 인상파들이 그림을 그리던 70년대와는 다르게 다시 한 번 변모되어 있었다. 파리에는 메트로가 설치되기 시작하였고 거리 곳곳에는 카마레나 잡지, 또는 상품을 선전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고갱, 뭉크, 비어즐리, 툴루즈-로트렉, 얀 토로프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구불구불하고 자유 분방한 선은 1890년대부터 1900년대에 걸쳐 유럽에서 유행된 아르누보(Art Nouveau)의 영향을 반영한다. 아르누보는 상징주의에서 파생되었지만 성격이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아르누보는 상징주의의 극단적인 이국주의(異國主義)나 데카당한 분위기에서 벗어났다. 일련의 미술가들은 고갱처럼 자신의 생활 방식을 과격하게 바꾸지 않고도 상징주의의 세련된 감성을 생활에 적응시킬 수 있다고 믿고 실현하려고 하였다. 아르누보는 원래 장식미술, 응용미술과 관련된 양식에서 출발하였으나 미술과 생활의 통합을 주장한 이 양식의 성격 때문에 회화, 조각, 건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장식미술에 대한 관심은 일반의 경제적 여유와 생활 향상에서도 연유되었지만, 미술이 대중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영역이었을 뿐 아니라 주제나 양식에서 자연의 모방이냐 아니냐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조형의 실험이 자유로웠다. 일화적인 내용과 외부 세계에서 독립된 아르누보는 1900년을 전후로하여 완전히 국제적으로 인기있는 양식이 되었다.
아르누보의 미학은 생활 자체의 개혁을 요구하였다. 일종의 총체미술(Gesamtkunstwerk)를 꿈꾸었던 아르누보는 새로운 건축, 새로운 가구, 새로운 회화를 요구하게 된다. 아르누보 양식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19세기 말의 예술의 성격을 반영하며 이미 언급했듯이 넓은 의미로는 상징주의의 한 양상으로 볼 수도 있다. 상징주의 시인들이 정확하게 묘사하기보다는 어렴풋이 시사하듯이, 또 고갱을 비롯한 상징주의 화가들이 선과 평면적 색채로 내면의 신비스러운 감정을 표현하고 암시하듯이, 아르누보 작가들은 평면적 형태와 다이나믹한 표면의 선을 통하여 감각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감정을 환기시키려 하였다. 아르누보 양식에 매료당한 화가들은 상당수 있었으며 고갱, 톨루즈-로트렉, 토로프, 드니 등이 그 속에 포함된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미술가로는 영국의 오브리 비어즐리와 비엔나의 구스타프 클림트를 꼽을 수 있다.
비어즐리(Aubrey Beardsley, 1872-1898)는 독창적 상상력과 정교하고 세련된 디자인 감각을 구사한 일종의 귀재로 미술사에서 기억되고 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억압된 이중적 도덕 개념으로 볼 때 그의 데카당한 분위기나 이미지와 문자의 교묘한 배합, 병적이고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느끼게 하는 이미지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죄악과 유혹의 이미지를 통해 세기말의 분위기와 고도의 세련미를 동시에 표현하였던 것이다.
비엔나의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정교한 장식성과 교묘히 감추어진 상징주의는 뭉크나 로댕의 「키스」에 비해 실제 숨을 쉬고 욕망을 느끼는 인간의 체취를 제한시켰고, 이것이 뭉크나 로댕이 현대미술의 시조로도 생각될 수 있는 반면 클림트가 그렇지 못한 이유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성의 문제, 육체적 욕망과 그것의 심리적 인식은 이제까지 덮어 두고 있었던 인간 본연의 모습을 포착한 것이었고 새로 발견된 인간들의 속성이었다.
클림트는 비엔나에서 모더니즘 미술 운동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고 1897년 진보적 미술가들을 이끌고 비엔나 분리파(Vienna Seccession)를 결성하였다. 이 분리파의 전시는 아르누보 양식이 지배적이었고 분리파 양식은 바로 아르누보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렸다. 클림트의 주제와 특이한 색채, 그리고 공간 구성은 그 후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와 같은 본격적인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전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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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2.07.13
  • 저작시기2002.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8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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