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음악의 네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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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맨델스존

2. 리스트

3. 쇼 팽

4. 베토벤

본문내용

지는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볼프강 모짜르트와 같은 신동으로 만들 생각을 가지고 매우 혹독한 훈련을 시켰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하여 어린 루트비히는 다락방에 갇혀 하루 종일 눈물을 흘리면서 건반을 두드려야 했기 때문에 피아노를 도끼로 부숴버리고 싶다고 어머니에게 자주 하소연했다고 한다. 베토벤이 대중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은 1778년 3월 26일 자신의 아버지가 가르치던 제자들과 함께 조그만 연주회에서이다. 그 연주회의 광고문에 따르면 그는 거기에서 '다양한 건반 고체르토와 트리오들'을 연주했다. 그 얼마 후에 그는 궁정 오르가니스트인 판덴 에덴(van den Eeden)에게■ 보내져서 음악 이론의 기초와 피아노를 배운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최초로 받게 되는 것은 1779년 선제후의 극장 음악감독으로 빈에 오게 된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로부터였는데, 그가 언제부터 베토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베토벤은1782년 이후 스승의 조수소로서 스승이 출타 중일 경우 그를 대신하는 연주가로서 이미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1787년에는 스승 네페의 권유에 의해 빈에 가서 모짜르트를 방문했으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내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그의 가정은 상당히 불우해졌으나, 베토벤은 많은 작품의 위촉을 받는 등,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후원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발트슈타인(Waldstein)백작의 소개로 교양있는 가문인 폰 브로이닝(von Breuing)가와 인연을 맺게 된다. 젊은 미망인인 브로이닝 부인은 베토벤에게 제 2의 어머니 역할을 했으며, 베토벤의 성격을 특히 잘 꿰뚫어 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심지어는 베토벤의 교우관계까지도 어느 정도 조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92년 11월에 베토벤은 빈에 와서 정착한다. 그로부터 그는 하이든에게서 작곡을 배운다. 그러나 하이든으로부터 배우는 기간은 1년을 넘기지 못한다. 자신의 실수들을 하이든이 간과해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베토벤은 몇 달 동안 작곡가인 요한 셍크(Johann Schenk)에게서 대위법을 배웠으나 하이든에게는 이 사실을 숨겼다. 또한 살리에리(Salieri)에게서 성악 작곡을 배우기도 하였으며, 발트슈타인 백작의 추천으로 파아니스트로서 빈의 사교계에서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실내악 작품을 작곡했으며, 독일 각지와 프라하 등지를 방문하여 공개 연주를 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갔다. 1800년 4월 2일에는 빈의 궁정극장에서 그의 교향곡 제1번이 대중적 공개 연주회로 초연된다. 그의 아홉 곡의 교향곡은 모두가 귀족으로만 제한된 청중을 윈한 것이 아닌 일반 시민 모두를■ 우니한 공개 연주회에서 초연된다. 베토벤이 진정으로 음악을 시민 사회로 끌어들인 최초의 작곡가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가 브룬슈빅(Brunswick)가와 인연을 맺게 되는 것도 이무렵의 일로서, 1799년 5월에 베토벤에게서 교습을 받고자 테레제(Therese)와 요제피네(Josephine)가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빈으로 왔다. 베노벤은 들들에게 무척 마음이 끌렸으며, 그들을 통해 동생 프란츠(Franz)와 막내 샤를로테(Charlotte), 그리고 사촌이자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었던 율리에(줄리에타) 구이치아르디(Julie [Giulietta] Guicciardi)와 사귀게 된다.■
정확히 언제부터 베토벤의 귓병이 시작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베토벤이 자신의 귓병을 호소한 것은 빈에서 함께 활동하던 친구들에게가 아니라, 고향 본에 있는 베겔러(Wegeler)에게 보낸 1801년 6월 29일자의 편지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음악로서 치명적인 귓병을 빈의 동료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으나 그 심각성이 날로 더해짐에 따라 본에 있는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1802년 무렵에는 귀머거리를 면할 수 없을 만큼귓병이 심각한 정도에 이르자, 저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게 된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다. 그리하여 당시의 시대 정신에 입각한 강인한 '영웅의 시대'를 시작한다. 1803년에는 <<영웅>>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하여 이듬해 완성하여 초연한다. 베토벤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위해 작곡했으나, 그가 황제에 즉위하자 헌사를 찢어버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이 교향곡과 연관되어 전해져 온다. 이어 제 4번 교향곡이 18065년에, 제 5번 <<운명>>이 1807년에, 그리고 제 6번 <<전원>>이 1808년에 작곡된다.■
1813년에는 교향곡 제 7번을 완성하여 초연하고, 1814년에는 오페라 <<피델리오>>를 재연하여 대성공을 거두는 등 음악가로서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되지만, 그의 경제적 생활은 항상 궁핍을 면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귓병은 더욱 악화되어 메트로놈 제작자인 멜첼(M. Maezel)이 제작해 준 보청기마저도 도움이 되지 못해서, 1818년 이후 모든 대화를 필담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작곡을 계속하여 1824년에는 제 9번 <<합창>>교향곡을 자신의 지휘로 초연한다. 연주가 끝났을 때 열광하는 청중들의 환호를 들을 수 없는 베토벤이 계속하여 오케스트라를 향해 서있자, 알토 솔리스트가 베토벤을 청중을 향해 돌려 세웠다. 그리하여 더욱 큰 갈채가 쏟아질 때 베토벤은 말없이 고개만 숙였고, 이 모습에 많은 부인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연주회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 이후 베토벤의 병세는 현저하게 악화되어 폐렴까지 겹쳐지게 되자 1827년에는 유언장을 쓴다. 베토벤이 죽기 몇 주 전, 이 대작곡가를 흠모해 왔던 슈베르트가 드디어 용기를 내어 베토벤을 방문한다. 마침내 1827년 3월 26일 천둥이 요한하게 치던 날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불끈 취고 번갯불에 비쳐 환해진 방안을 노려보고는 이 거인은 숨을 거두었다. 베토벤의 영구 행렬 뒤에는 슈베르트의 모습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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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2.10.11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6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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