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학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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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구약이라는 용어, Old Testament
2. 구약이 왜 필요한가?
3. 이스라엘 종교인가, 구약신학인가?
4. 구약학이라고 할 때, 구약신학의 자리가 어디인가?

본문내용

쓰고 있다. 하자의 전통은 예언자들 특히 아모스, 이사야를 호제()라고 부른다. 호제는 묵시를 부르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사회와 여사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예언자적인 전통에서 예언자의 역사관이 강조한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그러나 참 예언자는 언제나 심판후의 구원의 약속을 말했는데, 그 구원의 약속이 지연되므로 말미암아, 그것이 종말론적으로 초월적으로 정리되는 사상이 묵시사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핸슨의 견해도 수용하면서 예언자들의 예언이 종말론적으로 승화한 것이 묵시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 즉 이방의 문화에 동화하는 경우가 있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문화에 젖어 동화되어 버리는 경우, 배교하는 경우, 적극적으로 타협하는 경우,
) 즉 혼합주의적 성향으로 가장 나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등이 다 마음에 맞지 않아서 제4의 물결로 나타난 것이 묵시신학이다. 이것은 야웨 신아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운동이다. 그런데 문제는 수난의 현장에서 어떻게 신앙을 지켜나가는가 하는 것이 묵시신앙의 중요한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묵시사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이사야 24-27, 사 56-66 슥9-14, 이것이 초기 묵시문학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기의 문학이다. 그리고 이것이 다니엘서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사 56-66은 제3이사야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이사야 즉 1-39장의 심판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2이사야의 내용을 수정하면서 태동된 묵시적 사상의 태동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김중은 교수 견해;
전기 이사야와 후기 이사야로 나누어서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제2,3 이사야로 구분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는 없다. 선악과를 따먹을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성경은 결코 제2,3 이사야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성경적인 논리라고 보기 힘들다. 역사적이 이사야가 50년 정도 활동했다고 볼 수 있다. 청년 이사야의 활동이 39장까지 그리고 말년에 66장까지 환상을 볼 수 있는 나이에 구원과 새하늘 새땅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이 타당성이 있다. 바르트의 경우, 어거스틴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다. 사람의 생각은 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예언자에서 어떻게 묵시자로 갔는가? 예언자적 종말론과 묵시자적 종말론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예언자적 종말론 ; 내재적 종말론, 역사적 낙관론-새출애굽, 새언약, 새성전, 새다윗, 새마음을 말한다. 이것이 회개를 통한 역사의 연장선장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즉 심판을 말하고 종말을 말하지만 아모스의 경우에 종국적으로는 낙관주의이다.
묵시자적 종말론 ; 초월적 종말론, 역사비관적-단니엘 서 등에 보면 회개하라는 말이 없다. 오히려 "끝을 기다리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즉 마지막을 기다릴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자적 신학과는 다르다.
예언자적 신학은 사회참여를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묵시자적 신학은 사회참여가 박탈된 절대절명의 상황이다. 이스라엘에서 가증한 것이 선 것을 보거든 즉 절대절명의 상황을 전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니엘서는 마카비 항전시대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가 성전을 유린하고 돼지를 제단에 바치고 지성소를 짖밟고 이방인들을 데려와서 성소를 더럽히고 했다는 것을 미리 다니엘을 빌려와서 말했다고 비평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다니엘은 604년부터 고레스 원년 535년까지 바벨론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에서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상황을 기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다니엘은 묵시자라고 보는 것이 좋다. 70인역은 다니엘을 에스겔 다음에 편집했다. 묵시문학은 후대에 만들어진 마지막 산물이 아니고 예언자 계열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예언하는 전통에서 나온 역사적 산물이라고 하는 것이 올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초월적인 간섭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태도를 보여준다. 참여의 기회가 박탈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 기대는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새하늘과 새땅 즉 새로운 창조질서의 기다림이다. 둘째는 부활 사상이다. 억울한 사람, 순교한 자의 삶이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말하고 있다. 단 2:31-35에 느부갓네살의 꿈의 신상에 대한 해석이 나온다. 이것은 악의 세력이 먼저 멸망하고 역사의 종말은 역사의 연장선상이 아닌 초월적 역사간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니엘서의 신상에 대한 해석 7:1-12은 정해진 하나님의 때와 연결된다. 처음의 짐승은 사자, 그리고 곰, 표범(히랍), 뿔이 10인 힘센 짐승(로마제국의 역사적 진행) ; 이것은 결국 때가 이르매 믿는 자들의 세계가 이루어 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 때가 언제인가? 학자들에 의하면 그 때는 지연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기다림은 임박한 종말을 기대하고 있다. 종말은 반드시 오지만 언제 올지는 모른다는 것, 그래서 임박한 종말적 의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묵시적 기다림이다.
묵시사상의 도피적 묵시운동은 현실에서 도피해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이런 현상은 심화될 수 있다. 이것이 영지주의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도피나 묵시운동으로 가지 않았다. 역사의 현실을 인내하고 하나님의 초월적 개입을 기다릴 수 있는 가 하는 것이 묵시사상의 핵심이다. 이것은 성서신학적으로 지연된 재림으로 표현된다.(요한 계시록, 막 13장, 마 25장) 그러므로 예언신학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더 발전한 묵시신학적 인내가 요구된다. 묵시신학의 주요한 비전은 역사에 대한 초월과 내재이다. 즉 내재에 안주하지 않고 초월적 역사 개입에 대한 영적인 감각을 갖고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묵시자는 상황이 호전되면 다시 현실역사에 대한 참여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내재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시험: 정규남의 책, 차일즈의 책, 강의 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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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37페이지
  • 등록일2002.10.15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6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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