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에 대하여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한국의 발해사 인식>

1. 발해사인식의 전제
2. 고려시대의 발해사 인식
3. 조선시대의 발해사 인식
4. 한말의 발해사 인식
5. 독립운동기의 발해사 인식

<북한의 발해사 인식>
1. 연구 배경
2. 연구 동향
(1) 주민구성문제
(2) 지리 고증
(3) 대외 관계

◁ 참고 문언 ▷

본문내용

셋째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발해의 책성부와 신라 정천군사이에 39개의 역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의 시발역은 최북단의 덕원이 아니라 강릉일 가능성이 많다는 점, 넷째는 발해와 일본의 교섭으로 볼 때 겨울철에도 사신들이 오고 갔는데, 훈춘의 항구 역할을 하였던 모구위(현 러시아 포시예트)는 겨울철에 어는 항구라는 점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는 동경용원부의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설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그 이유의 첫째는 부거에는 무엇보다 고구려, 발해시기의 성터가 있는데 그것은 흙성이 아니라, 돌 성이라는 점, 둘째 그곳은 동남쪽으로 바다에 면해 있다는 점, 셋째 그곳은 얼지 않는 항구인 용제항과 여진항을 끼고 있다는 점, 넷째 조선시대 역참제도를 중심으로 볼 때, 그곳은 강릉으로부터 39개의 역이 된다는 점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곳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채태형도 부분적으로 인정하였지만, 동경용원부의 청진설은 아직 가설일 수밖에 없다. 북한의 오경 터 중에서 보다 확실히 입증된 곳은 남경남해부이다. 종래 남경남해부는 정약용이래 함경남도 함흥설이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힘입어 남경남해부는 함남 북청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먼저 북청은 삼수, 갑산 지방과 그 이북지역을 통하는 군사, 교통, 행정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그렇고, 문헌적으로는 {북청도호부신증읍지}와 {증보문헌비고}를 통해서도 확인되며, 최근 그곳에서 발굴된 발해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볼 때에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청해토성(북청토성) 안에서 관청터가 발견되었고, 그 서남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절터(신포시 오매리)가 발견되었는가 하면, 청해토성에서 동북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평리에 큰 무덤 떼가 있다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3) 대외 관계
발해의 대외 관계는 신라와 당, 그리고 일본 및 돌궐, 거란 등과의 관계로 생각할 수 있다. 박영해는 당과의 관계에 있어, 1) 당과의 국교 개시기, 2) 당나라의 흑수주설치 기도와 발해의 등주공격, 3) 북중국의 할 거적인 봉건세력(치청번진)과의 관계, 4) 당과의 국교 정상화로 서술하고 있으며, 일본과의 관계는 1) 사신교환과 국교의 목적, 2) 일본과의 경제교류, 일본에 중 문화적 영향, 그리고 거란과의 관계는 약술하고 있다. 박영해는 신라와의 관계를 당과 거란과의 관계에 언급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언급되었을 뿐이다. 대체적으로 발해의 신라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늦었던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관에 대한 관심이 우선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한다. 양국이 계속 평화상태를 유지하였다고 보았고, 이로써 양국은 왕래가 빈번했으리라는 것이다. 이어 박시형의 이러한 서술을 보다 적극화하여 양국의 교섭이 {삼국사기}보다 더 빈번했을 것이라고 하고,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고의로 발해를 말살하려다가 그만 부주의하여 남기게 된 실책의 소산이라 하고, 당시 동방의 국제정세가 어떻게 되여 있었던지 간에 적어도 이백수십년간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던 동족의 두 나라가 이와 같이 몰 교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라고도 하여 교섭이 빈번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발해사}는 {삼국사기} 보다는 좀더 왕래가 많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동족인 두 나라가 수백 년간 내왕이 매우 적었다고 하고, 그 이유는 전적으로 7세기 중엽 이후 심한 사대주의 외세의존 정책에 매달린 신라봉건 통치계급들의 죄악의 결과라고 하였다. 대립적인 면이 더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발해와 신라의 관계에 있어 또 하나 중요한 기록은 {협계태씨족보}이다. 여기에는 발해와 신라의 관계에 있어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즉, 발해 무왕 19년 봄 2월에 발해 수군이 출동하여 신라군사와 합세하여 일본병선 300척을 물리쳤다고 하며, 발해 원왕(元王)[大虔晃] 8년에 황룡사 탑이 무너졌다고 발해에 알렸다고 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본기)가 성덕왕 30년과 경문왕 8년에 일본병선이 침입했다는 내용과 황룡사탑이 벼락을 맞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이에 대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북한의 발해사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가라는 점을 밝히려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사의 정통성을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에서 찾아, 신라사 위주의 신라 중심적 남한 학계와 차별성을 두려는 것이다. 특히, '사회역사원리'로써의 주체사상을 발해사에도 크게 반영시키려는 것도 또한 하나의 특징이다. 초기의 발해사 연구는 지배층 중심의 역사연구였다고 한다. 왕조 중심의 기록을 따라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민구성문제에 있어서 피지배 민에게도 관심을 갖고 다수의 고구려유민설을 내놓기도 하였다. 지리 고증에 있어서는 남경남해부가 북청이라는 점을 밝혔고, 기타의 발해유적을 많이 발굴하여 발해문화의 일단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발해인 들의 생활 터도 전보다 많이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의 개방적인 문화에 대한 관심도 보다 적극적이어야 한다.
◁ 참고 문언 ▷
1. 북한의 한국사 인식(Ⅰ·Ⅱ)
- 저자 : 안병우·도진순
- 출판사 : 한길사
- 출판연도 : 1990년
2. 발해의 기원과 문화
- 저자 : 최무장
- 출판사 : 예문
- 출판연도 : 1988년
3. 발해의 대외관계사
- 저자 : 한규철
- 출판사 : 신서원
- 출판연도 : 1994년
4. 발해의 수수께끼
- 옮긴이: 최봉렬
- 출판사 : 교보문고
- 출판연도 : 1994년
5. 발해의 역사
- 저자 : 왕승예
- 출판사 : 흑룡강 인민 출판사
- 출판연도 : 1984년
6. 발해정치사연구
- 저자 : 송기호
- 출판사 :일조각
- 출판연도 : 1995년
7. 북한의 우리 고대사 인식(Ⅰ·Ⅱ)
- 엮은이 : 김정배
- 출판사 : 대륙연구소 출판부
- 출판연도 : 1991년
8. 발해를 다시본다
- 저자 : 송기호
- 출판사 : 주류성
- 출판일 : 1999년
9. 통일신라·발해와 일본의 관계
- 저자 : 최재석
- 출판사 : 일지사
- 출판일 : 1993년

추천자료

  • 가격2,3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2.11.18
  • 저작시기2002.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223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