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만세전
본문내용
내준다.
이것은 둘 다 개인적인 것이면서 개인보다 큰 민족을 염두에 둔 행동이다. 이런 결단은 귀향을 위한 여행과정에서 직접 당하고 보고 들은 사건을 통하여 자기라는 한 개인의 현실과 운명이 민족의 현실 및 운명과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음을 뼈져리게 느낀 결과이다. 하기야 그는 김천형과 정자에게 말한 대로 비현실적 이상주의나 유탕적 기분에서 벗어나 자기의 개성을 살리고 정신적으로 새로이 거듭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와 동시에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장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민족의 생명의 보존과 연속에 대한 작자의 염원이 그 심층부에 은밀히 숨어 있다. 이 작품의 사건과 분위기 중에서도 오래 독자의 기억에 남을 장면의 말, 곧 김천형이 기차여행 중에 잠깐 자기집에 들린 동생과 함께 역을 향하여 밤길을 걸으면서 '오늘 밤에는 꽤 쌓일 걸!'이라고 한 말이 감동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밤새도록 눈이 온 그 날의 날씨에 대한 이 평범한 말의 깊은 상징성은 어디에 기인할까? 한 겨울 밤 소리없이 많이 내려서 쌓이는 눈이 어딘지 비감하게 정겨운 이유는 무엇일까? 몇천 몇백년 동안 '조상이 근기있는 노력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져놓은' 토지가 야금야금 일제에 침탈되는 데 대한 원한을 그 땅과 함께 포근하게 덮고 감싸주려는 그 눈은 조상적부터 내린, 조상을 추억하게 하는 어둠에 묻힌 조상의 영혼의 가시적인 숨결이요, 그 애정과도 같다. 일제의 강압통치와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체제로 인심이 각박해진 땅에 옛날이나 다름없이 오랫동안 내리는 그 눈에는, 자손의 무기력과 피롤를 깨끗이 씻어주려는 정화작용이 느껴진다. 이런 상징적인 의미로 인하여 그 강설은 현실의 일이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에 쌓여 있다. 그런데 그 꾸준한 강설을 말하는 작자의 절실한 감정은 김천형과는 인연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작자 자신도 단지 작가적 본능으로 이 장면을 설정했다면 그 강설의 은밀한 깊은 뜻의 정확한 이해는 독자만의 몫일 것이다. 그점에 텍스트 이해의 복잡한 문제가 숨어 있다. 그러나 이 장면에 대한 거의 본능적이라 할 심층적인 공감은 작자와 독자에게 공통적인 것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그 조상과 국토는 갓장사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영동에서 승차한 그는 30대의 젊은이임에도 갓을 썼는데, 시대착오적이요 이기적인 민족주의자로서 일신의 안전을 제일 걱정하는 교활한 인간이다. 그가 총독통치에 불만인 것은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인의 대물린 의관과 산소의 보존 같은 풍속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조선인은 조선민족 전체가 아니라 자기처럼 완고한 일부 계층이다. 그의 이기적 사고는 만일 총독부의 계회대로 공동묘지제가 실시되어 지면이 축소되고 남는 땅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것이 뻔하다는 이인화의 생각이 민족 중심인 것과 대조적이다. 그가 갓을 쓰는 것은 그렇게 하면 일본 당국이 자기를 '요보'(조선인을 경멸하는 호칭-필자주)로 보고 조금 잘못한 게 있어도 용서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신 학문을 하고 독립운동을 하여 순사에게 얻어맞고 유치장에 가는 것보다 그런 천대를 감수하겠다고 이인화와의 대화에서 말한다. 이인화는 '천대를 받아두 맞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여 짐짓 무능자 노릇을 하는 그의 계산된 행동에서 조선인의 '고식, 미봉, 가식, 굴종, 비겁'을 본다. 갓장사는 그런 전형적 인간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처신법은 조선인 헌병보조원의 그에 대한 조사와 연행에 의하여 일제 통치 앞에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그 보조원은 영동에서 갓을 우송한 사건 때문에 그를 연행했는데, 아마 그와 비슷한 시골사람들의 어떤 보수적인 모임이 경찰의 의심을 산 것 같다. 그가 끌려나가자 '캄캄한 램프의 심짓불이 떨리듯이'떨던 승객들이 차내의 공포 분위기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이인화는 그 갓장사의 망실물인 헌우산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다.
그가 현재의 관능적 쾌락과 물질적 타산을 위해서만 사는 사촌형 김병화와 을라를 단연히 넘어서서 도달한 그의 민족의식과 개인주의적 성실성이라는 정당한 자기모순은 그의 성년식적 여행과정에서의 자기인식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만세전의 주인공이자 그 이상의 존재이다. 곧 작품의 결말에서 동경으로 떠나는 일본유학생이라는 한 개인이면서 그와 동시에 3.1독립운동으로 돌이킬 수 없이 전진하는 민족의 운명 그것이다. 그는 반봉건적인 결단에 의하여 아내를 희생함으로써 민족의 운명에 동참했었다. 따라서 그가 말한 '따뜻한 봄'은 현재의 겨레의 운명과 무관한 것이며 이인화 같은 젊은 대학생의 그 당시로서는 꿈 같은 희망에 불과하다. 그러나 민족은 큰 시련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그것은 향하여 온 겨레가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증명한 것이 만세전이라는 제목이요, 묘지에서 만세전으로의 뜻깊은 개제이다. 그러고 보면 만세전만큼 그 제목의 덕을 톡톡히 본 작품도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다.
이인화는 앞으로 보다 발전된 자기인식을 위하여 조국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가 문화적 고향으로 여긴 동경에서 그는 정치적 자유를 빼앗긴 망국 청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경에서 다시 귀향할 때 그는 어제의 그와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의 전도는 결코 순탄한 게 아니다. 자기의 민족으로 인한, 그 민족을 위한 고행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염상섭의 식민지시대의 소설 창작의 과정이나 한국소설사에서 만세전이 갖는 커다란 의미는 이 작품에 정치적 관심이 있는 지식인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정치적 관심이 없다면 그런 지식인은 다른 나라는 몰라도 난세의 땅에서만은 진정한 지식인일 수가 없다. 이광수의 무정 , 개척자, 재생, 흙, 시랑 등에 나오는 정치적 관심이 없는 지식인이 그 예이다.
만세전의 이인화는 일제의 조선인 차별대우와 공포 분위기 속에서의 감시 및 식민지적 모순과 봉건적 잔재의 해독 등을 직접 겪거나 본 결과 저항적 민족의식이 깨어나서 이전의 데카당스적 생활기분에서 벗어나버리며, 아직은 어떤 특정한 이데올리기의 소유자가 되기 이전이지만-이것은 E선생의 경우도 같다- 앞으로 사랑과죄 삼부작에 등장하는 지식인 주인공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다.
이것은 둘 다 개인적인 것이면서 개인보다 큰 민족을 염두에 둔 행동이다. 이런 결단은 귀향을 위한 여행과정에서 직접 당하고 보고 들은 사건을 통하여 자기라는 한 개인의 현실과 운명이 민족의 현실 및 운명과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음을 뼈져리게 느낀 결과이다. 하기야 그는 김천형과 정자에게 말한 대로 비현실적 이상주의나 유탕적 기분에서 벗어나 자기의 개성을 살리고 정신적으로 새로이 거듭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와 동시에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장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민족의 생명의 보존과 연속에 대한 작자의 염원이 그 심층부에 은밀히 숨어 있다. 이 작품의 사건과 분위기 중에서도 오래 독자의 기억에 남을 장면의 말, 곧 김천형이 기차여행 중에 잠깐 자기집에 들린 동생과 함께 역을 향하여 밤길을 걸으면서 '오늘 밤에는 꽤 쌓일 걸!'이라고 한 말이 감동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밤새도록 눈이 온 그 날의 날씨에 대한 이 평범한 말의 깊은 상징성은 어디에 기인할까? 한 겨울 밤 소리없이 많이 내려서 쌓이는 눈이 어딘지 비감하게 정겨운 이유는 무엇일까? 몇천 몇백년 동안 '조상이 근기있는 노력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져놓은' 토지가 야금야금 일제에 침탈되는 데 대한 원한을 그 땅과 함께 포근하게 덮고 감싸주려는 그 눈은 조상적부터 내린, 조상을 추억하게 하는 어둠에 묻힌 조상의 영혼의 가시적인 숨결이요, 그 애정과도 같다. 일제의 강압통치와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체제로 인심이 각박해진 땅에 옛날이나 다름없이 오랫동안 내리는 그 눈에는, 자손의 무기력과 피롤를 깨끗이 씻어주려는 정화작용이 느껴진다. 이런 상징적인 의미로 인하여 그 강설은 현실의 일이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에 쌓여 있다. 그런데 그 꾸준한 강설을 말하는 작자의 절실한 감정은 김천형과는 인연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작자 자신도 단지 작가적 본능으로 이 장면을 설정했다면 그 강설의 은밀한 깊은 뜻의 정확한 이해는 독자만의 몫일 것이다. 그점에 텍스트 이해의 복잡한 문제가 숨어 있다. 그러나 이 장면에 대한 거의 본능적이라 할 심층적인 공감은 작자와 독자에게 공통적인 것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그 조상과 국토는 갓장사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영동에서 승차한 그는 30대의 젊은이임에도 갓을 썼는데, 시대착오적이요 이기적인 민족주의자로서 일신의 안전을 제일 걱정하는 교활한 인간이다. 그가 총독통치에 불만인 것은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인의 대물린 의관과 산소의 보존 같은 풍속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조선인은 조선민족 전체가 아니라 자기처럼 완고한 일부 계층이다. 그의 이기적 사고는 만일 총독부의 계회대로 공동묘지제가 실시되어 지면이 축소되고 남는 땅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것이 뻔하다는 이인화의 생각이 민족 중심인 것과 대조적이다. 그가 갓을 쓰는 것은 그렇게 하면 일본 당국이 자기를 '요보'(조선인을 경멸하는 호칭-필자주)로 보고 조금 잘못한 게 있어도 용서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신 학문을 하고 독립운동을 하여 순사에게 얻어맞고 유치장에 가는 것보다 그런 천대를 감수하겠다고 이인화와의 대화에서 말한다. 이인화는 '천대를 받아두 맞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여 짐짓 무능자 노릇을 하는 그의 계산된 행동에서 조선인의 '고식, 미봉, 가식, 굴종, 비겁'을 본다. 갓장사는 그런 전형적 인간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처신법은 조선인 헌병보조원의 그에 대한 조사와 연행에 의하여 일제 통치 앞에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그 보조원은 영동에서 갓을 우송한 사건 때문에 그를 연행했는데, 아마 그와 비슷한 시골사람들의 어떤 보수적인 모임이 경찰의 의심을 산 것 같다. 그가 끌려나가자 '캄캄한 램프의 심짓불이 떨리듯이'떨던 승객들이 차내의 공포 분위기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이인화는 그 갓장사의 망실물인 헌우산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다.
그가 현재의 관능적 쾌락과 물질적 타산을 위해서만 사는 사촌형 김병화와 을라를 단연히 넘어서서 도달한 그의 민족의식과 개인주의적 성실성이라는 정당한 자기모순은 그의 성년식적 여행과정에서의 자기인식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만세전의 주인공이자 그 이상의 존재이다. 곧 작품의 결말에서 동경으로 떠나는 일본유학생이라는 한 개인이면서 그와 동시에 3.1독립운동으로 돌이킬 수 없이 전진하는 민족의 운명 그것이다. 그는 반봉건적인 결단에 의하여 아내를 희생함으로써 민족의 운명에 동참했었다. 따라서 그가 말한 '따뜻한 봄'은 현재의 겨레의 운명과 무관한 것이며 이인화 같은 젊은 대학생의 그 당시로서는 꿈 같은 희망에 불과하다. 그러나 민족은 큰 시련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그것은 향하여 온 겨레가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증명한 것이 만세전이라는 제목이요, 묘지에서 만세전으로의 뜻깊은 개제이다. 그러고 보면 만세전만큼 그 제목의 덕을 톡톡히 본 작품도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다.
이인화는 앞으로 보다 발전된 자기인식을 위하여 조국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가 문화적 고향으로 여긴 동경에서 그는 정치적 자유를 빼앗긴 망국 청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경에서 다시 귀향할 때 그는 어제의 그와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의 전도는 결코 순탄한 게 아니다. 자기의 민족으로 인한, 그 민족을 위한 고행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염상섭의 식민지시대의 소설 창작의 과정이나 한국소설사에서 만세전이 갖는 커다란 의미는 이 작품에 정치적 관심이 있는 지식인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정치적 관심이 없다면 그런 지식인은 다른 나라는 몰라도 난세의 땅에서만은 진정한 지식인일 수가 없다. 이광수의 무정 , 개척자, 재생, 흙, 시랑 등에 나오는 정치적 관심이 없는 지식인이 그 예이다.
만세전의 이인화는 일제의 조선인 차별대우와 공포 분위기 속에서의 감시 및 식민지적 모순과 봉건적 잔재의 해독 등을 직접 겪거나 본 결과 저항적 민족의식이 깨어나서 이전의 데카당스적 생활기분에서 벗어나버리며, 아직은 어떤 특정한 이데올리기의 소유자가 되기 이전이지만-이것은 E선생의 경우도 같다- 앞으로 사랑과죄 삼부작에 등장하는 지식인 주인공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