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과 바로크건축의 공간적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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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머리말

2.고딕 건축의 요소들

3.고딕 건축의 공간적 배치와 거리화 방식

본문내용

서 영토화되고 코드화된 빛으로 채워지는 눈을 생산한다. 그것은 신이 보게
하는 것을 본다. 그것이 심지어 거기서 벗어나려 할 때조차 정점으로, 빛의 발원점으로 다시 끌어들인다. 이는 계시를 듣고 받아들이는 귀, 그리고 그것을
전하는, 따라서 있되 말하지 못하는 입과 짝을 이룬다. 눈이나 귀가 비로소 보고, 듣고자 할 때조차 그것은 규명(manife-sto) 내지 해명(clarification)을
통해 신앙으로 재영토화된 이성에 의해 포획되고 코드화된다. “믿기 위해 이해하라!”
또한 시선과 동선의 간격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거리화는 고유한 주체-효과를 갖는다. 예를 들면 장대한 스케일은 들던 고개를 숙이게 하고,
수직선의 거대한 무게는 멈추어 무릎꿇게 하며, 그의 얼굴에서 가책(呵責)의 안면성(visag량t?을 새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 시선은
상승하지만, 그것은 정점을 향한 무한의 운동 속에서 정점을 우러르는 한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조용히 모은 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중세에
인간이 되는 법, 혹은 고딕적인 주체의 생산을 이러한 배치의 효과로써 설명한다면 지나친 단순화일까?
신과 인간, 정점과 시점 사이의 관계를 이처럼 ‘고딕적 거리화’라는 개념으로 파악한다면, 그 정점을 중심으로 한 시점들 간의 상호관계 역시 이러한
‘거리화’의 메커니즘 안에서 정의될 수 있다. 즉 분산되어 있는 시점들 간의 관계는 정점과 시점의 대응관계를 통해서 형성된다. 정점과 시점 사이의
이중의 거리가 그 관계에 끼어든다. 마찬가지로 신과 사람의 정점형 대응 관계 사이에서 사람들이 서로 관계지워지려면 그 정점을 통과하고 내포해야
한다. 여기에도 신과 사람간의 이중의 거리가 그 관계 사이에 끼어든다.
그러나 정점과 시점, 신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의 경직된, 결코 축소되지 않을 거리는 그러한 관계를 무한의 심연으로 갈라 놓는다. 신과 인간간의
관계야 어차피 그런 무한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다지만, 이처럼 사람간의 관계가 무한의 심연으로 갈라져 있다면 그 관계가 사실은 불가능해진다는
난점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이 무한한 이중의 심연을 유한한 어떤 거리로 치환하는 것이다. 이는 거리를 제한해 일상 속으로 삽입하는 방법이다. 신의 뜻을 대행하는 대행자
내지 중간자로서 성직자가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다. 신은 이제 이 대행자인 사제를 통해서 사람들이 서로 관계지워지도록 한다. 예컨대 출생에서 결혼,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현세적인 관계는 이 사제의 대행을 통해서 신의 이름으로 승인된다.
이는 사람들간의 관계가 신과 인간간 관계로부터 구분, 분리됨을 뜻한다. 무한의 거리가 끼어든 관계와 유한한 거리로 대행되는 관계. 성과 속, 종교
생활과 일상 생활의 분리. 이는 믿음과 이해,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구분과도 상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종종 극단화되어 이성을 신앙에서,
이해를 믿음에서 절대적으로 분리하는 신비주의로 나타난다. 유명론자로 유명한 옥캄의 윌리엄 수도사는 이러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다른 또 하나의 방법은 이 무한의 거리를 내재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을 인간의 내부로 끌어들였던 루터의 방법이 그렇다. ‘프로테스트’(protest)란
단지 면죄부를 팔아 성당을 짓는 교황청에 대한 저항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근본적으로는 신과의 거리를 유한화하는 데 대한 이들의 ‘항의’였다. 이는
무한의 거리를 아예 모든 일상과 세속적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일상 속에서도 그 무한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되지만, 이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신과의 관계로 환원해버리는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감내해야 했던 무한의 고독이 어쩌면 바로 여기서 연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38)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사람들 간의 현세적 관계를 매개하기 위한 또 다른 매개를39) 수반해야 했다는 점에서, 지극히 불완전한 방법이었던 셈이다.
32) 여기서 우리는 프랑클(「건축형태의 원리」, 34-36쪽, 63-65쪽)이 제안한 ‘공간군’(spatial group)과 ‘공간열’(spatial series)이란 개념을 다시
정의해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단위 공간의 형태나 특성이 단순히 부가(addition)되는 ‘공간군’과, 그것들이 서로 결합되면서 만드는
긴장(tension)에 의해 각각의 단위공간이 갖는 형태나 특성을 넘어서 계열화의 복합효과를 통해 작용하는 ‘공간열’이 그것이다.
33) N. Pevsner, 앞의 책, 102쪽.
34) 중세에 일반 신도들은 결코 내진에 들어갈 수 없었다(N. Pevsner, 앞의 책, 102쪽). 그것은 성직자가 신을 대신해서 서는 자리였던 것이다.
35) 주보랑을 따라 형성되는 이 동선은 측랑으로 벗어났다가 수랑(袖廊)을 가로질러 넘어온 탈영토화된 동선을 다시 내진 주위로 재영토화한다.
내진을 감싸는 사다리꼴의 공간열은, 사다리꼴의 기울어짐만큼이나 훨씬 강한 긴장으로 계열화되고, 그에 따라 동선을 강한 속도로 재코드화한다.
36) P. Frankl, 앞의 책, 63쪽.
37)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들로서는 단지 순수한 형태로 인지가능한 영역인 최고존재와 [대지 위의 이 낮은 자들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거리가
있다.”(E. Panofsky, “Abb Suger...,” 앞의 책, 38쪽)
38)베버는 프로테스탄트들의 이러한 고독이 구원에 대한 막연한 희망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직업(Beruf)을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Beruf)으로 알고
묵묵히 성실하고 근면하게 세속적 삶을 살아가는 세속적 합리주의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습속(Ethos)을 만들어 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M.Weber, Die Protestant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박성수 역, 「프로테스탄트 윤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1988)
39)이 또 다른 매개를 수행한 것은 구빈법, 거대한 감금, 채찍, 고문, 그리고 돈과 자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진경, 「맑스주의와 근대성」,
문화과학사, 1997, 14쪽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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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1.23
  • 저작시기2003.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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