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에 나타난 공동체목회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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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인간의 타락과 심판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창 3:14-19)

2. 가인과 아벨 사건의 교훈(창 4:1-26)

3. 모세의 살신성인정신

4. 슬로브핫의 딸들 이야기

5. 사사입다의 잘못된 서약

6. 제사장신탁에 나타난 목회자상

7.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에 나타난 공동체의식

8. 요시야의 실수

본문내용

반란이 이어졌으며 절망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사마리아를 정복한 아시리아는 민족간의 이주정책을 실시한다(왕하 17:24-41).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을 차지하고 살았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자기 마음대로 설치며 살았던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아시리아 제국 아래에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상태로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으며 고유의 문화전통을 형성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종교는 다원화되고 인종은 혼합되었으며 야훼종교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이제는 야훼종교를 지켜줄 정치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성서기자는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혼합정책의 희생물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후 유다인과 구별되는 계기가 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스 4:1-24).
8. 요시야의 실수
요시야(641-610 B.C.E.)는 유다 말기의 가장 훌륭한 성군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시리아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시야는 히스기야의 전례에 따라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야훼의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서를 발견하는데(621 B.C.E.) 이것은 현재 신명기의 일부(12-26장)로 여겨진다(왕하 22:8). 요시야는 '원신명기'라고도 불리는 그 율법서를 백성에게 공포하고 이를 준수할 것을 명한다(왕하 23:1-3).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성전에서 율법서를 발견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율법서가 발견된 이후 더 가속화된 것으로 생각된다(대하 34:3-7). 산당을 폐쇄하고, 바알과 일월성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몰아내는 등 일대 혁신을 단행한다(왕하 23:4-14).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예루살렘성 근처에 있었던 산당을 폐쇄한 것이다. 유다의 역대왕들이 부분적인 종교개혁을 했을지라도 산당만은 제거하지 못했다고 종종 전해지는데 예루살렘 근처 산당은 솔로몬에 의해 건립된 것이었다(왕하 23:13). 시돈의 아스다롯, 모압의 그모스, 암몬의 밀곰, 그리고 아세라 목상들과 사람의 해골이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는 것을 볼 때, 산당은 왕조 초기부터 유다가 멸망당하는 순간까지 거의 유다와 함께 해온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방종교가 야훼종교와 함께 그 명맥을 유지한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하는 것이요, 정신적으로 유다백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야훼종교의 개혁이 시급히 요청되는 시기였다. 요시야의 개혁정치는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1)솔로몬 이후 이방종교가 침투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2)지방성소인 산당을 제거하고; 3)율법(신명기법) 정신을 강화하고 예배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4)해안평야와 북쪽의 사마리아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정치의 중앙집권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레미야의 신탁가운데 상당부분이 신명기사가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신명기의 문체와 병행되는 구절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야 왕과 예레미야는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열왕기서가 예레미야를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예레미야 역시 요시야 왕에 대한 언급을 회피한다. 그러나 서로 동시대에 활동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어떤 형태로든 두 사람사이에 연관성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요시야의 치적은 다윗에 버금갈 정도였다. 당시 신흥 바벨론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아시리아가 약화된 틈을 타서 요시야는 잃었던 영토를 되찾고 유다의 홀로서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종교개혁과 정치력 다지기가 어느 정도 성공할 무렵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한다. 바벨론에 대항하기 위해 이집트의 느고 2세(610-595 B.C.E.)가 아시리아를 지원하러 올라갈 때 요시야가 그를 맞아 싸운다. 요시야는 이집트의 군대를 막아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했다. 그러나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이집트의 느고에게 목숨을 잃는다(609 B.C.E., 왕하 23:29-30). 요시야가 죽음으로써 그의 종교개혁과 정치적인 독립은 수포로 돌아가고 유다의 장래는 암울해진다. 이후 유다는 이집트의 속국이 되지만 결국 신흥 바벨론에 의해 함락된다(586 B.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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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3.02.08
  • 저작시기2003.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0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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