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을 통한 조선의 전후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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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 어 가 기

Ⅱ. 펼 치 기
1. 시대적 배경
2. 사회적 배경
3. 사상적 배경
4. 농민봉기
1) 1차 봉기
2) 집강소 개혁기
3) 2차 봉기
5. 동학농민운동의 영향 및 결과
1) 갑오개혁
2) 청일전쟁
6. 동학농민운동의 성격 및 의의
1) 반봉건 투쟁
2) 반외세 투쟁

Ⅲ. 아 우 르 기

본문내용

구실로 청국군을 공격하고 8월에 선전 포고하여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청과의 전쟁을 준비해오던 일본은 청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조선에서 청의 종주권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시모노셰키조약을 맺고 청에 대한 분할을 시작하였다.
청일전쟁은 이후 동아시아 3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얻은 막대한 배상금, 과중한 세금수탈로 만들어진 군사비, 식민지 타이완으로부터 얻은 이윤, 전쟁으로 축재한 자본가의 이윤 등을 바탕으로 전쟁 후 일본자본주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반면 조선은 갑오농민전쟁으로 표출되었던 변혁의지가 일본군에 의해 무력으로 탄압 당함으로써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었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대상으로 되어갔다. 또한 열강의 중국 분할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시대의 막이 열렸다.
6. 동학 농민운동의 성격 및 의의
동학농민운동은 특징적으로 반봉건, 반외세의 성격을 띤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조선후기 여러 농민항쟁을 통해 성장한 농민대중이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사회를 변혁하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을 물리치려 한 대규모의 반봉건 반외세투쟁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일본의 무력에 실패로 돌아갔지만, 광무년간의 사회개혁 및 항일운동 의병전쟁 3.1만세운동 상해임시정부 광복군 활동 등 농민혁명 이후에 전개되는 숱한 민족운동의 조직적 이념적 본령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 반봉건 투쟁
동학농민운동은 우선 가혹한 사회적, 경제적 수탈에 맞서 저항한 반봉건투쟁이었다. 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군은 경제적으로 농민층에 대한 봉건적 수탈을 제거하여 농민경제를 자립 안정시키고 봉건지배세력 및 외국자본주의 세력의 수탈로부터 소상인과 다수 빈농층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봉건적 신분질서를 해체하고 근대적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동학농민운동은 대체로 소농 빈농 소상인 빈민층의 지향과 요구를 추진력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비록 농민군이 봉건체제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지만, 각종 제도개혁과 함께 지주, 부민 등에 대한 징치 등 사회개혁운동이 적극 반영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지주들의 지대료를 탈취한다든가 전답문서를 강탈하기도 하였다. 즉 봉건적 토지 소유 관계의 폐기,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윤리의 부정, 신분적 계급 질서의 해체 등 조선 봉건사회질서를 부정하고 근대사회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은 동학농민운동의 반봉건적인 계급적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 것이었다.
2) 반외세투쟁
동학농민운동의 또 하나의 특징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서 분연히 일어난 반외세 투쟁의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농민들은 외세, 특히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강화도조약 이후부터 쌓여온 반일감정은 곡물의 일본수출로 인한 조선농가의 물가앙등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반일, 반외세감정은 교조신원운동 단계에서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광화문 복합상소 당시 서울에 붙었던 괘서들은 서양인과 일본인을 강력하게 배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일본의 철병을 위해 전주성에서 정부군과 화약을 맺을 정도로 동학농민군은 일본의 침략적 의도를 간파하고 적극적인 대응을 하였다. 특히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조선의 내정에 더욱 심한 간섭을 하자, 이에 맞서 더욱 큰 규모로 일어난 2차 봉기는 친일정권의 타도와 식민지화의 저지를 목적으로 일어난 반외세 투쟁의 정점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Ⅲ. 아 우 르 기
19세기말 조선왕조의 부패한 상황은 농민전쟁을 재촉하고 있었으며 거기에 일본의 경제적 침탈이 더해짐으로서 농민전쟁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농민전쟁의 외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동학'은 실은 한국고유의 사상인 조선학 내지는 조선정신이었던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공여부야 말로 조선이 스스로 내재적 발전을 이룰 수 있는가 아니면 식민지의 처지로 전락할 것인가의 분기점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농민전쟁은 드디어 실패로 돌아감으로서 조선은 완전히 자주성을 잃고 식민지의 길로 줄달음치게 된다. 동학농민운동은 세계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전쟁수행 과정이 어느 나라의 농민전쟁보다도 규모가 크며 반제, 반봉건의 성격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전쟁이었다.
반봉건, 반제국주의의 농민 전쟁인 동학농민운동은 개화파 정권의 외세의존적인 자세와 농민군과의 불타협, 일본군의 개입, 조직적 투쟁적으로 시종되지 못한 농민군의 한계, 사회 체제를 뒤엎을 만한 새로운 사회세력의 미성숙으로 일단 실패로 끝났다. 여기서 민인 주체에 의한 근대 사회의 수립은 일단 폐기되었다. 그러나 그 힘은 척사세력의 배외주의와 일정한 선에서 연결되어 의병전쟁의 추진력이 되었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길은 이로써 조선 정부, 즉 봉건 지주적 관료의 손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외세, 즉 일본군에 의존하여 국내 민족 운동의 맥을 끊어버림으로써 민인과 유리되고, 반대로 더욱더 일본에 밀착됨으로써 한말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외세에 의존한 개화 정권의 사회 문제 민족 문제에 대한 처리 자세는 이러하였다. 민족과 타협하여 사태를 수습하지 않고, 열강의 물량공세에 정신적으로 함몰되어, 근대주의적인 자세에서 일본과 결탁하여 폭력으로 해결한 것이었다. 갑오개혁의 타율성과 개화=망국의 논리는 이런 구체적인 정치사정과 관련해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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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고 문 헌■
1.한국 역사 연구회, 1992 <1984년 농민전쟁연구1> 역사 비평사
2.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1993 <東學農民革命과 社會變動> 한울
3.박성래, 1994 <韓國史10,11> 한길사
4.구양근, 1993 <東學農民戰爭 原因論> 아세아문화사
5.李鉉宗, 1966 <東學이란 무엇인가> 신동아
6.이진영, 1993 <甲午農民戰爭記> 한국사연구
7.李明南, 1988 <初期東學의 半封建性의 陽界에 관한 硏究> 부산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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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9.27
  • 저작시기20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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