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유역 고대사회 성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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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산강유역 고대사회 성격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백제 영역설
1) 기왕의 통설 : 369년 영역화설
2) 수정설 : 단계적 영역화설

3. 마한 잔존세력설

4. 왜와의 관계설

5. 맺음말

본문내용

478년에는 '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을 정식으로 책봉받아, 왜가 지배하게 되었다는 6국 중의 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송서에 나오는 이 책봉기사는 일찍이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전거가 되어 왔던 바이나, 근래에는 이들 6국에 대해 일본열도 내에 있던 分國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6국을 지배한다는 왜의 허구적 희망 사항을 송이 무심히 묵인해 준 것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6국 중의 慕韓과 秦韓은 다른 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칭호로서, 왜가 만들어낸 가공의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사회를 백제의 복속을 받지 않은 독립세력으로 간주하고 이를 慕韓으로 비정한 것은, 송으로부터 제수받은 '都督 … 諸軍事'의 작호를 새삼스레 사실의 반영으로 간주하려는 혐의가 짙다.
둘째, 전방후원형 고분의 조영주체를 倭系集團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전남지방 전방후원형 고분은 그 규모면에서 볼 때 수장층의 고분에 해당될 정도로 대형이다. 흔히 고대의 고분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전방후원형 고분을 조영한 주체를 왜계집단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곧 이 지역에 대한 그들의 정치적 지배력을 상당 정도 전제하는 것이 된다. 이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굳이 '모한'으로 비정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바이다.
이처럼 이 견해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모한으로 비정하고 이에 대한 왜계집단의 모종의 역할(혹은 영향력)을 부각시킴으로써, 한·일 관계사에 미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아예 倭(韓) 자체였던 것으로 파악하려는 견해가 제기되어 또 다른 측면에서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 논지는 대개 이러하다.
① 영산강유역(특히 나주 반남면) 옹관고분을 염두에 둘 때, 영산강유역에는 경기·충청도 일대의 마한연맹체와는 별개의 세력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데, 그것이 바로 倭 혹은 倭韓이다. ② {三國志} 魏書 韓傳에 '韓은 …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은 倭와 接해 있다.(南與倭接) … (변진)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南)라 되어 있는데, '接'이라는 표현은 육지로 경계를 삼을 때 쓰는 표현이므로, 왜는 마한과 변진(변한)의 남쪽에 있었다고 해야한다. ③ 광개토왕비문에서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는 倭가 바로 한반도 남쪽에 있던 왜이다. 이 왜는 황해도 지역에서 고구려와 접전을 할 정도로 강성했다. ④ 한반도 남부의 왜는 400년과 404년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 광개토왕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타격을 입고 5세기 이후에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그래서 5세기 이후의 중국 사서에서는 왜의 중심지를 일본열도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⑤ 일본열도로 건너간 왜는 과거 한반도에서 차지했던 위상을 근거로 하여 남부의 연고권을 주장하였는데, {송사}에 나오는 왜 5왕의 '도독 …제군사'의 작호 제수 요청 기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⑥ 임나일본부란 야마토정부의 한반도 남부지배기관이 아니라 한반도에 존재했던 왜한의 고토회복운동의 전초기지였다.
영산강유역의 대형 옹관고분에 주목하여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세력의 존재를 상정하고, 관계 문헌 자료의 재해석을 통해서 이를 倭 혹은 倭韓으로 비정한 것이다. 그러나 문헌 자료의 해석에 많은 무리가 따른다. 예를 들어 '接'의 표현을 쓴 것은 당시 바다와 섬들을 통해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반드시 육지로 경계를 삼는 경우에만 쓰는 표현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또한 ⑤와 ⑥의 주장은 신판 기마민족설을 연상시키는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옹관고분에 주목하여 영산강유역에 독자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주장하는 것은 좋지만, 이를 왜 혹은 왜한으로 비정한 것은 모한으로 비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이다.
5. 맺음말
고고 자료로 볼 때, 영산강유역은 확실히 다양한 문화요소가 복합적으로 존재한다. 고분의 예를 들면, 매장주체시설에 따라 옹관고분, 횡혈식 석실분 등이 있고, 분구의 형태에 따라 원형, (截頭)방대형, 장방형, 장타원형, 전방후원형, 긴 사다리꼴형의 고분이 있으며, 분구의 재료에 따라 토분 이외에 즙석분도 있다. 유물 역시 영산강유역 특유의 유물에서 백제계, 가야계, 왜계, 중국계 등이 뒤섞여 있다.
이러한 문화요소의 다양성과 복합성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바로서, 바로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개방적 성격을 반영하는 바라 할 것이다. 이는 곧 영산강유역 고대사회가 해양문화적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는 데에서 연유하는 것으로서, 이 지역의 고분들이 영산강과 서남해 바다를 따라서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문화요소를 시기적 편년에 따라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성격 규명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럴 때 역시 정리의 중심은 옹관고분에 두어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최근 옹관고분에 대한 고고학계의 편년체계에 따르면, 3세기대에 대두하여 6세기 전반까지 발전적으로 지속해 간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 기간 동안은 옹관고분을 지표로 하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우선 상정하고, 그의 성립·전개·소멸의 과정을 따져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여타의 문화요소들을 통해서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와 백제·왜·가야·중국 등과의 관계를 각각 따져보는 것 역시 필요하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연구는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단순히 백제가 영역화시킨 대상으로서만 보았는가 하면, 마한 문화의 일부로서 속단해 버리기도 하고, 왜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고 보기도 하였다.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하기 보다는 외부 세력 혹은 외부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만 상대적으로 규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지칭하는 이름도 다양하였다. 독자성을 부인하는 입장에서는 '백제'의 일개 지방으로 파악하였는가 하면, 그 독자성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마한', '모한', 혹은 '왜'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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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0.15
  • 저작시기200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6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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