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문제 - 전후처리과정에서의 히틀러의 등장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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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목 차 ■
Ⅰ. 서 논

Ⅱ. 본 논
1. 문제의 제기
1) 1차 세계대전의 종결; 독일을 중심으로
2. 베르사이유체제의 성립
3. 패전 독일 문제
1)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
2) 독일의 배상과 전채문제
▶도오즈안

Ⅲ. 결 논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가 해이해져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불안이 심하게 일어났고, 이 때문에 전선에서도 군인들이 사기가 떨어지고 전투에만 전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즉 소모전·장기전 속에서 전선과 후방이 따로 없이 전 국민이 일치단결 하여 인내하고 전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국민총력전임에도 불구하고 후방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국민의 일체성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전시공사가 끼친 악영향도 컸다. 전시공사는 반관반민 형태의 주식회사(AG) 혹은 합자회사(Gmbh)로 정부와 원료생산자·원료가공자 등이 공동운영하고 국가의 감독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간 기업가들의 이윤배제가 사실상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여 전시공사의 민간 자본가들에게는 축재 기회가 되었으며, 특히 관리운영권에 관계된 관료들의 부정부패의온상이 되기도 했다. 힌덴부르크 계획의 시행 후에 전시공사의 구조개편은 관료주의적으로 되어 신속성과 효율성·합리성이 결여되어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또한 전시원료관리국이나 전시식량관리국 등에서도 운영체제의 비능률성과 지체성으로 긍정적인 기여보다 부정적인 불법성, 비합리성과 부정의 개입 등으로 물자부족상태 속에서도 반국가적·반사회적인 행위들이 많았던 것이다. 또한 밀수와 전쟁모리배들의 발호도 전쟁수행중의 독일을 어둡게 했다.
지배층과 상류계층에서 오히려 밀수행위를 하거나 편승하는 등, 비도덕성이 심화되어 전방의 군대나 후방 국민들의 의식저하에 큰 영향을 준 것이다. 전쟁모리배 등의 일확천금사상의 만연은 전시 국민들의 의식을 부정적·파괴적으로 만드는 데 큰 몫을 했다. 특히 그들의 대도시에서의 사치·방탕한 생활과, 오만불손하며 비윤리적, 비도덕적 생활은 전쟁희생물로 내일의 프롤레타리아가 될 운명에 놓여 있었던 중산층에게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했으며, 더욱이 하층민의 최저생계유지 노력에는 찬물을 끼얹었다. 특히 밀수업자·전쟁모리배들의 행위는, 전시에 얻게 된 노동권을 가지고 국가구성원의 일익을 담당하게 된 노동자들의 자부심이 채 굳어지기도 전에 계급투쟁의식과 적개심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의 파업행위나 소요는 1917년에야 일어났다. 1917년 4월 빵배급 악화로 베를린을 중심으로 대도시와 루르 지방에서 발생한 소요는 대규모적인 것은 아니었고 이유도 단순한 배급량의 감소에 따른 것이어서 노조와 社民黨(SPD)의 노력으로 완화될 수 있었다. 또한 전황의 악화에 따라 조업중지현상이 일어나자 소규모의 파업과 소요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큰 영향은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1918년에 들어서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대도시의 군수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의 군수공장 파업은 특별한 의미가 있기 마련이다. 군수공장 노동자들은 배급문제에서는 다른 분야 노동자와는 달리 대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차원에서의 노동운동의 성격은 희박했다. 즉 파업의 의미는 한편으로는 패색이 짙어진 전쟁에 대해 자포자기에 빠진 노동자들이 하루 속히 종전을 유도하기 위해 국내에서의 전쟁수행을 저해한 데 그 특징이 있었다고 하겠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가 1917년의 러시아혁명의 성공으로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가 된 것에 자극을 받아 독일의 제국주의와 황제 중심의 국가체제를 전복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1918년 여름에는 북부 슐레지엔 광산지대에서 대규모의 노동자 소요가 일어났다. 여기서도 타민수업체 노동자보다 배급이 좋았으므로 이들은 광부라는 특수 중노동자로서의 건강과 급식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의 식량사정의 전반적 악화를 알고 있었기에 배급량보다는 오히려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단축해 주기를 요구했다. 이들의 시위와 소요가 8월까지 계속되어 전시군법에 적용되어 주모자들은 군법정에 서게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패전이 역력해져 항복 필연성이 대두되고 있던 때라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이와 같이 후방의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핍박은 전방에서의 전쟁수행에 장애가 되기도 했지만, 이로써 이른바 '등뒤에서 단도 찌르기'라는 변명은 크게 설득력이 없다고 하겠다. 군사작전상의 실책과 대외적 여건이 독일패망에 훨씬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영국의 해상봉쇄로 독일에 필요한 원료와 식량수입이 두절되었다는 것은, 독일로 하여금 장기전에 대비할 수 있는 군수품생산과 식량조달면에서 이미 패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 또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해상봉쇄를 뚫고 연합국 측의 대미무역을 견제하려 했지만, 결과는 미국의 참전을 야기하고 말았으며, 1917년 가을 이래로 미국의 막대한 군수물자와 참신한 미군병력이 유럽대륙에 상륙했다는 것도 독일 패전을 가속화시킨 것이었다. 참호전으로 쌍방이 지쳐 있고 전쟁사기가 떨어져 있을 때, 독일 측에는 새로운 요소가 없었지만 연합국 측에는 새로운 용기와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독일 군은 오히려 사기가 떨어지고 패전의식과 정신적 자세의 분란과 해이로 말미암아 이미 패전의 신호가 울렸는데도 1년 이상 억지로 버텨본 데 지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독일이 받은 피해는 그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노동자·농민 등 모든 국민들이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빠른 평화협상을 희망하며, 사회불안이 가중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독일이 이 기간에 잃은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전시에도 지탱하였던 국민들의 도덕성과 윤리성의 파괴와 죄의식의 마비현상의 심화였다. 독일 국민 사이에는 인간이기를 포기할 정도로 정신적·도덕적 타락이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Ⅳ. 참고문헌
1. 윌리엄 카,『독일근대사』,이민호·강철구 역, 탐구당, 1988
2. 이민호,『독일사의 재국면』, 느티나무, 1991
3. 이주영,「베르사이유 조약과 대독 배상문제」『서양사론 7·8합집』, 1967
4. 성미경,「베르사이유 조약의 비준을 둘러싼 윌슨과 의회의 대립」, 경북대학교 교육대학 원 석사학위논문
5. 이범석,「바이마르 공화국의 역사 : 독일 민주주의의 좌절」『조의설 기념논총』, 1967
6. 신일범,「바이마르 공화국의 외교정책」『단국대 사학지』, 1982
7. 신일범,「바이마르 공화국의 기원에 관한 고찰」『단국대 사학지』,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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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5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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