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논
Ⅱ. 본 논
1. 18세기의 프랑스
1)경제적 변동
2)사회적 모순
3)통치체제의 모순
2. 나폴레옹
1)보나파르트 나폴레옹
2)나폴레옹의 등장과 프랑스 혁명
3. 통령정부시대
(1)권력강화
(2)개혁 프로그램
(3)군사원정과 불안한 평화
4. 재정시대
(1)제정수립
(2)영국과의 전쟁
(3)대륙봉쇄와 이베리아 반도 원정
(4)제정의 강화
(5)러시아 원정의 참패와 그 이후
(6)나폴레옹 법전
Ⅲ. 결 논
1. 몰락과 퇴위
2. 엘바와 백일천하
3. 세인트헬레나에서의 망명생활
Ⅳ. 참고문헌
Ⅱ. 본 논
1. 18세기의 프랑스
1)경제적 변동
2)사회적 모순
3)통치체제의 모순
2. 나폴레옹
1)보나파르트 나폴레옹
2)나폴레옹의 등장과 프랑스 혁명
3. 통령정부시대
(1)권력강화
(2)개혁 프로그램
(3)군사원정과 불안한 평화
4. 재정시대
(1)제정수립
(2)영국과의 전쟁
(3)대륙봉쇄와 이베리아 반도 원정
(4)제정의 강화
(5)러시아 원정의 참패와 그 이후
(6)나폴레옹 법전
Ⅲ. 결 논
1. 몰락과 퇴위
2. 엘바와 백일천하
3. 세인트헬레나에서의 망명생활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4월 6일 퇴위했다. 퐁텐블로 조약으로 동맹군들은 그에게 엘바 섬을 영주로 주면서 해마다 프랑스 정부로 부터 200만 프랑을 받고 400명의 자원 호위대를 거느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나폴레옹은 5월 4일 엘바에 도착했다.
2. 엘바와 백일천하
그러나 나폴레옹은 45세에 그냥 뒤로 물러앉을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복고왕정이 곧 비판을 받았다. (1814년 프랑스 사람들은 대부분 황제에게 넌더리가 나 있었지만 부르봉 가문의 복귀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이 거둔 성과에 강한 애착을 가졌고 돌아온 루이 18세와 망명귀족들이 그것을 망가뜨리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정치에 무관심하던 국민들은 의혹을 갖게 되었고 쫓겨났던 사람들의 저항과 음모가 되살아났다. 나폴레옹은 대륙의 상황에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빈에서는 유럽의 앞날을 의논하는 회의가 열렸고, 엘바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몇몇 외교관들이 나폴레옹 그 자신을 대서양의 먼 섬으로 쫓아내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다. 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가 아내와 아들이 그에게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애인이 있어 남편과 함께 살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에 대한 연금지불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 은 나폴레옹의 행동을 취하게 만드는 계기를 주었다. 그는 1815년 3월 1일 칸에 상륙했다. 알프스를 넘을 때 공화주의자 농민들이 그에게 모여들었고 그르노블 근처에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달려온 군인들이 그의 편으로 돌아섰다. 3월 20일 그는 파리로 들어갔으며 이제 한해 전에 몰락한 황제로서가 아니라 혁명정신의 화신으로서 다시 권좌에 올랐다. 대중의 지지를 받으려면 자코뱅파와 동맹을 맺어야 했으나 1793년과 1794년처럼 사회주의적인 실험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믿은 나폴레옹은 루이 18세와 거의 똑같은 정치체제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의 열정이 썰물처럼 급속히 사라졌고 나폴레옹의 모험은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듯했다. 동맹군에 맞서 벨기에로 진격한 나폴레옹은 1815년 6월 16일에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을 무찔렀다. 이틀 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승리한 영웅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군과 워털루에서 마주쳤다. 격렬한 전투 끝에 나폴레옹이 승리를 눈앞에 두었을 때, 게프하르트 불뤼허가 이끄는 포로이센군이 도착해 전세가 역전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의회의 요구로 1815년 6월 22일 퇴위했다. 7월 3일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영국 함대는 모든 프랑스 선박의 출항을 금지했고 이에 그는 영국 정부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영국 정부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동맹국들의 의견을 감안해 멀리 떨어진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그를 억류하기로 결정했다.
3. 세인트헬레나에서의 망명생활
1815년 10월 15일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에 상륙해 원래 부총독 관저로 지어진 롱우드(Longwood)에 자리 잡았다. 그는 영국군 장교가 수행하는 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으나 스스로 롱우드에 틀어박혔다. 그의 첫 번째 비서였던 라스 카즈는 이 때의 생활을 나중에 <세인트헬레나의 회상 M'emorial de sainte-Helene> 으로 엮어 냈다. (1823) 나폴레옹은 단조로운 은둔생활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아내인 마리 루이즈에게서는 소식도 없었다. 나폴레옹은 그녀가 경호원인 오스트리아 장교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빈에 살고 있던 아들의 소식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리고 세인트헬레나의 총독으로 부임한 허드슨 로와도 사이가 매우 나빴다. 1817년말에 처음으로 위궤양이나 위암으로 보이는 병세가 나타났고 1821년초부터는 병이 급속히 악화되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불가능은 없다고 장담하던 나폴레옹, 스스로 황제가 되어 대관식 때 왕관을 뺏어서 스스로 쓸 정도로 자신만만했던 나폴레옹. 5피트 2인치(1백57cm)의 키에 코르시카 섬의 시골 출신임에도 '나는 환경을 만드는 사람이다' 하고 장담을 하기도 했는데, 말년의 실패를 보면 '불가능은 없다'던 패기도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는 교훈이 된다. 젊은 시절의 나폴레옹은 본받을 바가 많았지만, 절대권력이라는 마약이 정신을 황폐화시켰던 것이다. 말년의 나폴레옹은 어쩌면 오만과 과대망상증 환자였다 할 것이다. 오만방자한데다가 방심을 하고 있는 사람이 차분히 작전을 짜서 대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서 본 바가 있다. 그러나 만약 루이16세가 유능하였다면, 그래서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프랑스 혁명이 그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4월 마지막 유언을 남겼는데 "내 유골을 센 강변에 묻어 내가 그토록 사랑한 프랑스 국민들 속에 있게 해달라...나는 영국의 과두정치와 그에 고용된 암살자들 때문에 내 명을 못다 살고 가노라."5월 5일 오후 5시 49분에 그는 52세도 안된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유해에 그가 좋아했던 군복을 입히고 마렝고 전투 때 입었던 잿빛 외투를 덮었다. 루퍼트 밸리에서 소박한 장례식이 치러졌고, 묘비에는 이름도 없이 "여기에 눕다" (Ci-Git)라는 말만 새겼다.
※참고문헌※
1)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빠리 꼼뮨까지』, 까치, 1980
2) Karl Marx 지음; 허교진 옮김, 『프랑스 혁명사 3부작』,소나무, 1987
3) F. 퓌레;D. 리셰 [공]지음;김응종 옮김, 『프랑스 혁명사』, 일월서각, 1992
4) G. 르페브르 지음;민석홍 옮김, 『프랑스 혁명』, 을유문화사, 1994
5) 김민제, 『프랑스 혁명의 이상과 현실』, 역민사, 1998
6) Mathiez, Albert지음;김종철 옮김, 『프랑스革命史』,창작과비평사, 1982
7) 유강호, 『불가능을 모른 거장 나폴레옹』, 정훈, 1981
8) 장 뿔 카우프만 지음;김철 옮김, 『나폴레옹:세인트헬레나토의 항해』, 세계사, 1998
9) 이세희,『나폴레옹 시대 프랑스의 농민문화』, 부대사학, 1998
2. 엘바와 백일천하
그러나 나폴레옹은 45세에 그냥 뒤로 물러앉을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복고왕정이 곧 비판을 받았다. (1814년 프랑스 사람들은 대부분 황제에게 넌더리가 나 있었지만 부르봉 가문의 복귀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이 거둔 성과에 강한 애착을 가졌고 돌아온 루이 18세와 망명귀족들이 그것을 망가뜨리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정치에 무관심하던 국민들은 의혹을 갖게 되었고 쫓겨났던 사람들의 저항과 음모가 되살아났다. 나폴레옹은 대륙의 상황에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빈에서는 유럽의 앞날을 의논하는 회의가 열렸고, 엘바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몇몇 외교관들이 나폴레옹 그 자신을 대서양의 먼 섬으로 쫓아내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다. 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가 아내와 아들이 그에게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애인이 있어 남편과 함께 살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에 대한 연금지불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 은 나폴레옹의 행동을 취하게 만드는 계기를 주었다. 그는 1815년 3월 1일 칸에 상륙했다. 알프스를 넘을 때 공화주의자 농민들이 그에게 모여들었고 그르노블 근처에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달려온 군인들이 그의 편으로 돌아섰다. 3월 20일 그는 파리로 들어갔으며 이제 한해 전에 몰락한 황제로서가 아니라 혁명정신의 화신으로서 다시 권좌에 올랐다. 대중의 지지를 받으려면 자코뱅파와 동맹을 맺어야 했으나 1793년과 1794년처럼 사회주의적인 실험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믿은 나폴레옹은 루이 18세와 거의 똑같은 정치체제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의 열정이 썰물처럼 급속히 사라졌고 나폴레옹의 모험은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듯했다. 동맹군에 맞서 벨기에로 진격한 나폴레옹은 1815년 6월 16일에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을 무찔렀다. 이틀 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승리한 영웅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군과 워털루에서 마주쳤다. 격렬한 전투 끝에 나폴레옹이 승리를 눈앞에 두었을 때, 게프하르트 불뤼허가 이끄는 포로이센군이 도착해 전세가 역전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의회의 요구로 1815년 6월 22일 퇴위했다. 7월 3일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영국 함대는 모든 프랑스 선박의 출항을 금지했고 이에 그는 영국 정부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영국 정부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동맹국들의 의견을 감안해 멀리 떨어진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그를 억류하기로 결정했다.
3. 세인트헬레나에서의 망명생활
1815년 10월 15일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에 상륙해 원래 부총독 관저로 지어진 롱우드(Longwood)에 자리 잡았다. 그는 영국군 장교가 수행하는 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으나 스스로 롱우드에 틀어박혔다. 그의 첫 번째 비서였던 라스 카즈는 이 때의 생활을 나중에 <세인트헬레나의 회상 M'emorial de sainte-Helene> 으로 엮어 냈다. (1823) 나폴레옹은 단조로운 은둔생활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아내인 마리 루이즈에게서는 소식도 없었다. 나폴레옹은 그녀가 경호원인 오스트리아 장교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빈에 살고 있던 아들의 소식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리고 세인트헬레나의 총독으로 부임한 허드슨 로와도 사이가 매우 나빴다. 1817년말에 처음으로 위궤양이나 위암으로 보이는 병세가 나타났고 1821년초부터는 병이 급속히 악화되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불가능은 없다고 장담하던 나폴레옹, 스스로 황제가 되어 대관식 때 왕관을 뺏어서 스스로 쓸 정도로 자신만만했던 나폴레옹. 5피트 2인치(1백57cm)의 키에 코르시카 섬의 시골 출신임에도 '나는 환경을 만드는 사람이다' 하고 장담을 하기도 했는데, 말년의 실패를 보면 '불가능은 없다'던 패기도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는 교훈이 된다. 젊은 시절의 나폴레옹은 본받을 바가 많았지만, 절대권력이라는 마약이 정신을 황폐화시켰던 것이다. 말년의 나폴레옹은 어쩌면 오만과 과대망상증 환자였다 할 것이다. 오만방자한데다가 방심을 하고 있는 사람이 차분히 작전을 짜서 대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서 본 바가 있다. 그러나 만약 루이16세가 유능하였다면, 그래서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프랑스 혁명이 그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4월 마지막 유언을 남겼는데 "내 유골을 센 강변에 묻어 내가 그토록 사랑한 프랑스 국민들 속에 있게 해달라...나는 영국의 과두정치와 그에 고용된 암살자들 때문에 내 명을 못다 살고 가노라."5월 5일 오후 5시 49분에 그는 52세도 안된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유해에 그가 좋아했던 군복을 입히고 마렝고 전투 때 입었던 잿빛 외투를 덮었다. 루퍼트 밸리에서 소박한 장례식이 치러졌고, 묘비에는 이름도 없이 "여기에 눕다" (Ci-Git)라는 말만 새겼다.
※참고문헌※
1)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빠리 꼼뮨까지』, 까치, 1980
2) Karl Marx 지음; 허교진 옮김, 『프랑스 혁명사 3부작』,소나무, 1987
3) F. 퓌레;D. 리셰 [공]지음;김응종 옮김, 『프랑스 혁명사』, 일월서각, 1992
4) G. 르페브르 지음;민석홍 옮김, 『프랑스 혁명』, 을유문화사, 1994
5) 김민제, 『프랑스 혁명의 이상과 현실』, 역민사, 1998
6) Mathiez, Albert지음;김종철 옮김, 『프랑스革命史』,창작과비평사, 1982
7) 유강호, 『불가능을 모른 거장 나폴레옹』, 정훈, 1981
8) 장 뿔 카우프만 지음;김철 옮김, 『나폴레옹:세인트헬레나토의 항해』, 세계사, 1998
9) 이세희,『나폴레옹 시대 프랑스의 농민문화』, 부대사학,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