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유럽과 기독교의 간신, 레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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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세유럽과 기독교의 간신, 레오 3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PART1. 생각해볼 문제들

PART2. 샤를마뉴의 황제대관식의 주체와 의미
1. 서 론
2. 본 론
(1) 800년 황제 대관식
(2) 황제 대관식 당시 사회 배경
(3) 황제 대관식 후...
(4) 대관식에 관한 역사가의 평가
3. 결 론

본문내용

신앙을 보급하고, 이단에 의하여 신앙이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였으며, 그리고 교회를 지배하고 보호함으로써 8세기 서유럽인들이 고대하는 기독교 황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다고 다니슬리는 설명하였다. 이렇게 외적·내적인 자격을 갖추고 있는 상태에서 때마침 비잔티움에서 이레네(Irene) 여제가 불법적으로 제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서유럽인들이 이를 제국의 황제직이 궐위된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샤를마뉴는 자연스럽게 황제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제프리 배러클로우(Barraclough, Geoffrey)는 대관식은 프랑크 왕이 아니라 교황청의 작품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고 하였다. 대관식에 관하여 샤를마뉴가 불만을 표시하였으며 대관식으로 인해서 당장 혜택을 보는 사람은 그 지위가 안전할 교황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비잔티움 사람들의 눈에는 한 찬탈자에 불과한 샤를마뉴를 로마 황제 자리에 앉혀놓음으로써 교황은 비잔티움로부터 귀찮은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었으며 듬직한 '보호자'가 배후에 있었으므로 자신은 편하게 자신의 영역과 위치를 확보해 나갈 수 있었다.
3. 결 론
지금까지 살펴본 중세유럽 사회의 배경과 800년 황제 대관식, 또 그 사건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을 보며 나 자신이 내린 결론은 800년 사건은 상당히 교활하고 뻔뻔한 교황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이라고 생각되어진다.
레오 3세의 교활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 있다. 800년 황제 대관식 이전 자신의 위증죄와 간통죄로 인하여 로마인들에 의해 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에서 그는 폭행과 감금만 당했을 뿐이다. 하지만 전해져 오는 바는 그를 습격했던 자들이 그의 혀를 뽑았고 그를 장님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내용도 있다. 역사서마다 그 폭행의 정도가 틀린데 이는 교황의 교활한 발상에서 나온 듯 하다. 경미로운 폭행과 감금을 과장하여 소문을 낸 후 신의 기적을 통해서 그의 혀와 눈을 되찾았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결백을 밝히며 또한 자신이 신에 의한 인물임을 강조하였을 법하다.
또한 레오 3세는 그러한 폭행을 당한 후 샤를마뉴를 찾아가 자신을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간청하였다. 얼마나 불쌍한 표정을 하고 손과 발이 닳도록 빌면서 비굴하게 굴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한 그를 샤를마뉴는 정중히 맞았고 교황에 대한 최선의 예우를 하였으며 그의 간청을 승낙하여 그 혼란을 수습하러 로마까지 직접 갔다. 혼란을 어느정도 잠재워주고 자신의 죄까지 무죄임을 밝혀 교황에게는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그런데 교황은 그것을 계기로 800년 크리스마스 미사 때 샤를마뉴에게 갑자기 황제의 관을 씌우며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역기서 '갑자기'란 말은 샤를마뉴에게 해당하는 것이고 교황측에서는 사전 모의 및 철저한 계획에 의해 준비해왔기 때문에 몇 단계의 절차를 멈춤없이 일사천리로 진행하였다. 당황한 샤를마뉴는 레오 3세와 로마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과 성스러움을 부여하였고 때문에 충실한 기독교 신자인 샤를마뉴는 거절할 수 가 없었다. 자신을 살려준 은인에게 관을 씌워주며 자신에 의한 황제임을 표시하며 그가 황제의 우위에 있으려는 의도를 치밀한 계획을 세워 실행한, 참으로 발찍하고 뻔뻔한 인간이다.
샤를마뉴는 서유럽의 대부분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면서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으로 여겨졌다. 그는 유럽은 물론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무력적인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관념 속에는 로마는 하나이며 그 하나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것은 동로마의 비잔티움임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대관식에 관한 샤를마뉴의 불만은 교황에 대한 두 가지의 불만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버젓이 비잔티움에 황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하여 샤를마뉴에게 커다란 부담을 안겨준 것에 대한 불만과 둘째, 감히 자신의 심판까지 받은 자인 교황이라는 자에 의해 황제의 관을 썼다는 것에 대한 불쾌함일 것이다. 물론 대관식을 통하여 샤를마뉴도 도덕적인 위신이 증가되고, 인근의 정복지에 대한 지배권에 합법성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샤를마뉴는 대관식이라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 도덕성과 정당성을 찾으며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 교황에 의한 대관식을 바라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황은 그 동안 자신의 보호자였던 비잔티움 제국을 이제 쓸모없으니 버리는 식으로 배반을 하고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샤를마뉴의 제국에 고대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부여하여 자신의 '보호자'로 삼고 교황의 영역과 위치, 힘을 키워갔다. 이는 후에 프랑크족이 교황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때 교황은 다른 족의 왕에게 대관식을 하여 프랑크 제국을 배반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샤를마뉴를 찬양하며 그를 위대하며 모범적인 왕으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샤를마뉴와 레오 3세 두 인물 중 좀 더 교활하고 뻔뻔한, 나의 사상과 이념과는 다분히 틀린 레오 3세의 그런 모습을 강조하고 싶었다. 이러한 의도로 인해 샤를마뉴가 더 위대하고 모범적인 왕으로 보였다면 그것은 나의 글을 쓰는 솜씨에 능력이 없음에 그렇다. 내가 보는 샤를마뉴는 단지 무력으로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 놓았지만, 후세에 그 제국의 존속을 위한 준비가 미비해 샤를마뉴 사후 곧 제국의 분열과 멸망을 가져오게 한 그냥 어느 정도의 무력과 어느 정도의 야망을 가진 일개 왕으로만 평가된다. 그리고 레오 3세는 자신의 어려움을 도와준 은인의 위에 서려는 뻔뻔한 인간이며 그 은인을 배반할 여지가 다분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800년 황제 대관식은 교황이 종교적인 성스러움을 믿고 샤를마뉴를 당황케 하면서까지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위하여 자신이 주체가 되어 대관식을 거행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참고 문헌
이경구. "중세의 정치 이데올로기" 「도서출판 느티나무」(2000) p.9∼82
이경구 "중세 제국 이념의 성격" 「전북대 대학원」(1994)
조성을 편. "유럽세계의 형성" 「집현전」(1988) p.44∼57
아인하르트 "샤를마뉴의 생애(Vita Carli)" 조신광 역.「신아 출판사」(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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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4.25
  • 저작시기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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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47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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