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조사(인천 도호부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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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집무실로서 객사(客舍)의 동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건물의 격식은 객사보다 한 단계 떨어졌으나 그 지역 최고 실력자의 지위에 합당하게 끔 위엄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중앙은 마루로 된 대청으로 지방의 일반행정업무와 재판이 여기서 행하여 졌고, 좌우의 온돌방은 숙식공간 이라기 보다는 사무공간이나 응접공간이었다. 수령의 가족이 머무는 내아(內衙)는 따로 배치되었다.
중문(中門)
중문(中門)은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으로 6방관속들의 집무처이기도 하였으며, 삼문(三門)은 임금의 위패를 모신 객사에 출입하기 위하여 설치된 문이다. 이들 문을 아문(衙門)인 외삼문과 구별하여 내삼문이라 하였으며 이문 역시 세 개로 되어 있어 삼문이라 하는데 가운데 부분이 솟아있어 솟을삼문 이라 한다.
공수(公須)
공수는
객사(客舍)의 부속건물로써 부엌·곳간·온돌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능으로는 객사를 관리하는 인원과 중앙 사신을 수행한 수행인력들이 유숙하고, 객사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곳이다. 이들 업무를 주관하는 곳이 공수청(公須廳)이다.
사주문(四柱門)
동헌의
부속 건물로써, 수령의 개인비서와 자제가 머무르는 책방외에 가족이 머무는 내아(內衙)가 따로 배치되었는데, 사주문은 내아에서 동헌으로 왕래할 때 사용되는 문이다
충의비(忠義碑)
이 비는 조선왕조개국(1392년)으로부터 한일합방(1910년)까지 인천도호부사를 지낸 355인의 성명을 새긴 것으로 이는 조선왕조실록과 1799년에 발간된 인천부읍지등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유교정치이념에서 충과 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을 임금은 신하의 바른 도리인 의를 실천함으로써 이를 통해 민본정치를 구현하려 하였다.
도후부사의 임무
도호부사는 도호부의 모든 행정을 총괄하는 자로서 그 주된 임무는 수령칠사(守令七事)라 하여
① 농사와 누에치는 일을 잘돌볼 것
② 인구를 늘릴 것
③ 교육을 진흥시킬 것
④ 군대에 관한 사무를 바르게 할 것
⑤ 부역을 균등히 할 것
⑥ 민사의 소송을 바르게 할 것
⑦ 간교하고 교활함이 없도록 할 것
등 지방수령의 공통임무에 속해 있으며 지방관의 치척은 관찰사를 통해 매년 임금에게 보고되었다. 또한 유사시에는 군대를 지휘하여 전투에 임하는 등 군사지휘권도 장악하고 있었다
망궐의식(望闕儀式)
외직(外職)에 근무하는 관원이 궁궐에 나아가 임금을 직접 뵙지 못할 때 멀리서 궁궐을 향해 행하는 의식이다. 객사는 지방관이 임금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곳이기 때문에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전청(殿廳)의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향하여 절을 올리는 삭망례(朔望禮)를 거행하였다. 또 임금이나 왕비의 탄신일을 비롯하여 정월초하루,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등의 명절에도 객사 앞뜰에서 대궐을 향해 절을 오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놀이문화체험
윷놀이, 투호, 고누, 장기, 곤장
곤장(棍杖)
조선시대 형구의 하나. 버드나무로 넓적하게 만들어
도둑이나 군율을 어긴 죄인의 볼기를 치는 것으로
증곤 대곤 중권 소권 치도곤의 5가지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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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14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5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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