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자본주의의 농업적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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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Ⅰ. 인구모델과 계급관계.
Ⅱ. 중세유럽에서의 계급구조와 계급조직 그리고 봉건제의 발전.
Ⅲ. 봉건제의 위기에 따른 결과와 뒤이은 발전 패턴.

결론 : 산업과 농업 그리고 경제발전.

본문내용

자본투자를 바탕으로 한 차지인들이 얼마만큼 효율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가에 달려 있었다. 요컨데, 자본주의적 차지농의 수익은 영주의 지대수취를 위한 전제조건을 이루었다.
경제적 성공은 축적과 혁신에 달려있었고, 이러한 맥락에서는 차지인이 자금부족에 시달리는 경우 영주가 어느 정도 자본투자의 역할을 떠맡는 것이 때로는 영주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영주와 차지이니 맺고 있던 그와 같은 공생관계는 경제적으로 훌륭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으며, 역동적인 농업발전을 뒷받침하는 경향이 있었다.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영국의 대농장과 프랑스의 대농장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곡물가격이 낮았던 시대인 17세기 후반에 그들이 서로 분명히 다르게 기능했다는 것에 더할 나위 없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같은 시대에 1660년대로부터 줄곧 식량가격이 낮았던 상황에 대해 프랑스의 토지소유자들이 보여주었던 반응은, 쿠퍼 스스로 지적하고 있듯이 영국에서의 반응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농산물에 대한 시장, 즉 가격이 하락하는 데 발맞추어 지대도 하락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켜주는' 시장이 쇠퇴해가는데 직면하여, 프랑스의 토지소유자들은 지대상승을 고집하였다. 그 결과 대규모 차지농들을 포함한 엄청난 수의 차지인들이 높은 지대와 낮은 가격 사이의 틈바구니에 끼여 쥐어짜이으로써 빚구렁에 빠져들었으며, 결국에는 농장의 여러 장비와 심지어 집안가구들까지 포함하여 그들이 축적해 놓은 재산의 대부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농장 자체마저도 영주에게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이 영국의 영주들보다 프랑스 영주들이 더 또는 덜 합리적이었다거나 또는 덜 자비로웠다는 것을 가리켜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다른 상황에 직면해 있었을 뿐이었다.
<법칙의 역사성> 한 가지 단서가 붙어야만 한다. 그 단서란 중세와 근대초의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규칙'이 모든 시대 모든 지역에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특정한 소유체제와 특정한 경제 발전 - 경로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가 역사를 초월하는 법칙에 의해 지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에로의 도약이 일단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도약은 그에 뒤이어 다른 곳에서 벌어지게 될 비슷한 과정들의 조건과 성격을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변화시켰다. 19세기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소규모 소유자 겸 경작자들을 기반으로 하는 농업이 경제발전에 지니고 있던 의미는 변화되어갔다. 시장을 위한 생산을 지향하게 만드는 유인들은 더욱 커졌고, 생계를 위해 생산을 하게 만드는 압력은 줄어들었으며, 소규모 가족농장의 기술적인 잠재력은 더욱 팽창하였다. 산업의 성장 덕분에 더욱더 폭넓은 범위의 상품들을 싼 값으로 구입할 수 있게 되면서, 농민들로 하여금 필수품의 자가생산을 포기하고 전문화를 이루어내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은 시장에서 구입하도록 부추기는 요인들은 엄청나게 커졌다. 또한 온 세계에 걸쳐 기본적인 식량의 공급이 점점 더 늘어났고 수송수단의 발달로 그 처럼 늘어나고 있던 식량을 더 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전문화에 따른 위험부담도 점점 더 줄어들어 갔다. 끝으로 19세기로 가면서 인공비료가 발달하고 생물학적 지식이 증대됨에 따라, 소규모 가족농장은 특정한 몇몇 생산유형에서 긍정적인 이점들을 갖게 되었다. 특히 새로운 형태의 가축생산에서는 가장 수준 높은 기술들이 대규모 농장 못지 않게 소규모 농장에서도 훌륭하게 이용될 수 있었으며 자본도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더구나 소규모 가족농장에서는 가축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보다 질높게 그리고 보다 정성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반면에 임금노동을 사용하는 대규모 농장에서는 대개 그러지 못했다. 이러한 발전들은 당연하게 농민영농이 직접생산자를 생계수단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경제외적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이 순조롭게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영농으로 이행하는 것 - 즉 가족 농장이 계속 살아남는 것 - 을 훨씬 더 쉽게 만들었다.
결론 : 산업과 농업 그리고 경제발전.
영국의 경제로 하여금 대륙의 이웃들에게 이미 막혀 있었던 발전에로의 길로 올라설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은, 바로 농업에서의 계급관계 또는 소유관계가 바뀐 데 뿌리를 둔 농업생산성의 증대였다. 이러한 발전에의 길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전반적인 위기'가 경제를 사로잡았던 시대를 거쳐서 산업혁명의 시대에 들어와서 까지, 산업화가 계속되고 경제가 전반적으로 성장한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17세기에 영국의 경제는 그것이 옛 멜더스적 한계들 너머로 인구를 계속 증가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전통에 의해 지배되고 있던 수출을 위한 직물산업이 위기와 정체를 맞이한 데 직면하여 산업과 경제 전반의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대륙에 있는 모든 다른 나라의 경제와 뚜렷하게 구별되고 있다. 영국산업의 지속적인 팽창은 어쩌면 원래 직물수출로부터 힘을 얻었을지도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궁극적으로 농업생산의 지속적인 탈바꿈에 뿌리를 둔 내수시장의 성장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프랑스와 서부 독일 그리고 동부 유럽에 걸쳐 제조업생산이 널리 하락한 데에는 바로 내수 시장이 - 농업생산성의 하락으로 말미암아 잠식당한 바람에 - 한정되어 있었고 또 쇠퇴해 갔던 것이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인구는 17세기말을 거쳐 18세기에 들어서서까지 줄곧 증가하였고, 그와 함께 줄곧 농업으로부터 산업으로, 그리고 농촌지역으로부터 도시지역으로 옮아가, 런던 뿐만 아니라 리버풀, 맨체스터, 그리고 버밍엄도 크게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곡물가격은 더 이상 상승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실질임금이 증대될 수 있었고, 그리하여 농업인구에게는 새로운 황금시대가 열렸다. 바로 농업이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는 소득을 증가시키고 그에 따라 구매력을 증대시켜 주었던 덕분에 내수시장은 줄곧 팽창해 갔다. 이리하여 산업은 농업에 힘입어 발전해 갔고, 동시에 거꾸로 농업이 더더욱 개선을 이루어가도록 자극해 주었다. 이와 같이 위로 향한 발전적인 순환은 산업혁명에 들어서서까지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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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4페이지
  • 등록일2004.10.02
  • 저작시기2004.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9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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