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평전(탐구와 도전의 역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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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신문화운동의 시기를 반영, 문화주의적인 경향을 갖고 있었으나, 점차 러시아 10월 혁명에 자극을 받아 「서민의 승리」등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사회주의에 기울어졌다. 미완의 서한 「이수상에게 도서열람을 요청하는 편지」가 바로 그 증례의 하나인데, 그의 서한이 지칭한 '이수상(李守常)'은 바로 중국 공산당 창립자의 한 사람이며 북경 대학 도서고나 주임 이대소를 가리킨 것이다.
당시 이대소는 5·4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중국 신사상·신문화운동의 중심적 인물의 한 사람이었으며, 당시 대표적인 사회주의 이론가로서 그 명성이 드높을 때였다. 또 그는 1921년 진독수(陳獨秀)와 함께 중국 공산당의 결성에 참여했고, 1924년에는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여 국민혁명을 추진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신채호와 이대소 사이에 어떠한 교류가 있었는지는 알 수없으나, 아마도 신채호는 그보다 8세나 연하인 이 진보적인 사상가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자료를 참고할 수 있는 편의까지 부탁하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는 과연 신채호의 소망이 실현되었는지는 단언할 수는 없으나 이대소에게 쓴 서한의 절실한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그는 북경 대학 도서관을 이용하는 데는 성공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이대소와의 교유관계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미완의 「이수상에게 도서열람을 요청하는 편지」의 일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일에는 또한 나라 운명의 절박함을 통곡하고 분연히 일어나 붓을 내던지고 몇몇 烈士와 함께 나라을 위하여 죽음으로써 적과 싸우기를 기도(祈禱)하였더니, 벌써 정세는 더욱 틀려지고 기회는 더욱 멀어져 안타깝게도 부질없이 머리만 어루만지는 동안 어느덧 천한 나이 사십을 지났습니다. 이리하여 무장단투(武將段鬪)란 유생의 능사가 아니라, 국가 흥망이란 일조(一朝)의 돌발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으니, 도연명(陶淵明)같이 비록 얼른 '오늘의 옳음'j을 감히 자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거백옥(遽伯玉)과 같이 또한 '전일의 그름'은 자인합니다.
······ 생각컨대 오직 남은 바 역사 연구사업을 계속 진행하고 과거의 견문을 정리 편수하여 후진 학자들로 하여금 나라의 전통을 잊지 말게 하는데 혹 만일의 도움이 될까 합니다. 그러나 서가(書架)가 비고 자료가 부족하며 또 객지에서 낭탁(囊 )이 빈약할 뿐더러 돈이 있어도 요구되는 문헌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개전집』별집, pp.367∼368).
한편 이 무렵을 전후해서 신채호는 역사를 연구하는 틈틈이 몇 편의 시작(始作)을 남기고 있는데, 모두 한결같이 애국적인 넋과 뜻을 펴지 못한채 방황하는 망명객의 심회를 읊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한시 「북경우음(北京偶吟)」·「가형기일(家兄忌日)」·「몽김연성(夢金演性)」·「고원(故園)」·「독사(讀史)」·「계해 시월 초이일(癸亥 十月 初二日)」등과, 한글시 「1월 28일」·「새벽의 별」등의 시편들은 모두 이 시기의 소작(所作)인데, 여기서는 제작 연대가 뚜렷한 1923년 10월 작인 「계해 10월 초 2일」이란 한시 1편만을 살펴본다.
하늘과 바다가 넓고 넓구나.
마움놓고 다녀도 거칠 것 없네.
생사를 잊었는데 病이 무엇가.
명리(名利)를 떠났거늘 무얼 구하랴.
곳곳이 강과 호수 배 탈 수 있고,
눈과 달이 사람 불러 같이 거니네.
애닯게 시 읊는 것 웃지 말아라.
천추에 뜻 아는 이 응당 있으리.
天空海潤 悠悠
放膽行時便自由
忘却死生無腹病
淡於名利更何求
江湖滿地堪依棹
雪月激人共上樓
莫笑撚 吟獨苦
千秋應有百牙酬
(『개전집』별집, p.348)
이 시속에는 학문과 사색, 그리고 망명지를 자유롭게 떠돌면서 고난속에서도 시업(時業)에 잠기는 신채호의 은밀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그의 시편 중 상당 부분이 1920∼1925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그는 이 시기 연구생활에 전념하면서 가장 많은 자기성찰과 사색의 시긴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5. 관음사(觀音寺)의 승려 생활
신채호가 연구생활을 계속하던 1924년 초봄, 그는 극심한 경제난에 부딪쳤다. 그는 며칠을 굶으면서 겨우 연명하는 형편이었으므로 그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대부분의 망명 지사들의 처지도 그러했지만 이 무렵의 신채호의 북경생활은 갈수록 절박하고 암담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와 친교가 있던 중국인 진(陳)씨가 그의 궁핍을 목격하고 이런 고통을 겪을 바에야 절에 들어가 중(僧)이 되 것을 권하였다. 이때 그는 결심했다. 차라리 산하여 수도(修道)하는 셈치고 불경(佛經)이나 읽으며 승려생활을 하겠다고······ . 그러면 굶주림은 물론 틈틈이 연구생활도 계속할 수 있을게 아니냐고.······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북경에 있던 가까운 동지들에게 일체 알리지 않고, 표연(飄然)히 입산을 단행하였다. 이해 3월 10일의 일이었다.
그가 승려생활을 보낸 관음사(觀音寺)는, 북경 천교(天橋) 관음호동(觀音胡同 )에 있는 옛 사찰로서 중이 무려 수백 명이나 되는 매우 규모가 큰절이었다. 그는 입산하는 즉시 머리를 삭발하고 참선을 하면서 승려의 戒를 받기 위해 고행(苦行)에 들어갔다.
그의 시조 「육십일일 계단(六十一日 戒壇)의 회고(懷古)」는 그가 2개월여에 걸쳐 고행도 하며 수도생활에 전념하는 자신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으로, 이 무렵 그의 생활 편린을 엿보게 하는 작품의 하나이다.
1
한뼘쯤 되는 자리에 비비고 드러누우니
공기야 좋든 말든 이( )나 아니 물었으면
아무리 이가 물지라도 긁을 수 가 있었으면.
2
서너 겹 옷을 입고 대웅전에 올라서니
옷 속의 뭇이(群 )들은 조찬회(朝餐會)를 하는고나
여래(如來)가 어질다더니 악형을 하십니다.
3
상오 두 시에 눈 비비고 일어나서
하오 열 시까지 절하기로 판을 짠다
인제야 뻣뻣한 허리 버릇을 때는고나.
4
삼월 십일에 이 문에 들어올 때
매화 한 송이도 필 염두를 안 냈더니
절하고 나오는 동안에(61일만에 拜禮가 始畢)
온 나무가 텅 비었고나.
5
여래의 사십 구년
손끝 혀끝 다 놀리어 얻은 바 무엇이냐?
걸식단장(乞食團長) 실직(實職)이다
걸식에 배가 부르매 설법을 하였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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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43페이지
  • 등록일2004.10.20
  • 저작시기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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