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문화와 흥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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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사로국의 형성
신라의 왕
신라의 명칭
신라의 발전과 전개
▶신라의 정치구조 발전
▶신라의 반도 통일
▶평가
신라의 정치
▶중앙행정제도
▶지방행정 제도
▶군사제도
신라의 사회, 경제
▶신라의 골품제도
▶화백제도
▶토지제도
▶수공업과 상업
신라의 문화
▶학문
▶종교
▶문학
▶미술
-신라 금관
-석굴암
-불국사
-석조물과 범종
신라의 멸망

본문내용

서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였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고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심성을 도야하는 데 치중했던 만큼 소의경전(所依經典)에 의존하는 교종과는 대립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 결과 이른바 선종 9산(山)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지방의 호족들이 이를 환영하여 후원했기 때문이다. 이 선종은 신라의 지배체제에 반발하고 있던 지방 호족들에게 그 사상적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종국적으로는 신라의 멸망을 재촉하였던 것이다.
신라의 도가사상은 장생불사의 신선사상으로서 관심을 끌었으나, 한편으로는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자연 속에 묻히려는 은둔사상도 발달하였다. 신라 말기에 지방세력이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유행되기 시작한 사상에는 풍수지리설이 있는데, 이 설은 호족들에게 크게 신봉되었다.
▶문학
신라시대의 문학은 원시 심성(心性)의 가장 보편적인 정령관(精靈觀)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가무 제의에서 발생하였다. 향가와 같은 시가문학은 불교의 영향을 받아 향가로 발전하였으며, 통일기에는 월명사나 충담사, 처용과 같은 많은 향가 작가가 나타났다. 소박한 노래 속에 부드러운 가락을 담고 있어 국문학상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향가는 무격(巫覡)의 신가(神歌)에 대치되는 불교적인 노래였으나, 그 자체가 주원적(呪願的)인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많은 향가가 제작되어 888년에는 왕명으로 『삼대목 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하기까지 했는데, 이 책은 현재에는 전하지 않고 있으므로 그 전체의 수를 짐작하기 어렵다. 향가는 주로 승려나 화랑과 같은 지배층에 속하는 사람을 작가로 한 귀족사회의 소산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민중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어 국민 상하간에 널리 애창되었다.
▶미술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고분을 통하여 많은 예술품을 남겼다. 신라의 고분은 나무로 짜여진 목관분과 돌로 짜여진 석실분으로 되어 있는데,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유물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금관총(1921), 금령총(1924), 서봉총(1926), 천마총(1973), 황남대총(1974) 등이다. 특히,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와 그 밖의 출토품 들은 신라 미술의 높은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신라인의 예술 활동은 대부분 종교 생활에서 나온 불교 미술이나 사후 세계를 위한 고분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조형 미술이 중심이었던 이 시기의 예술품은 조화와 정교함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통일기의 예술은 주로 귀족 중심의 문화로 발달하였다. 문무왕 때 지은 궁성 안의 인공 연못인 안압지에서 나온 많은 유물은 당시의 화려했던 궁중 생활과 귀족 생활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신라 금관
신라 금관은 그 양식이 시베리아의 샤먼의 관과 통하는 점을 지니고 있어, 불교 수용 이전 시기 신라 문화의 성격의 일면을 전해주고 있다.
-석굴암
통일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 작품인 석굴암은 35대 경덕왕 때 김대성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신라의 종교와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져서 이루어진 석굴암은 내부에서 본존 불상을 중심으로 보살상, 나한상, 인왕상 등 여러 보살상을 배치하여 불교 세계의 이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각 보살상의 조각품들은 온화하면서도 강한 힘에 넘치는 조화미와 함께 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석굴암은 큰 돌로 벽을 두르고 사방에 아치 형으로 돌을 쌓아 천장을 만든 석굴로, 우리 나라 석굴 사원의 대표적 건물이다
-불국사
신라 불교 예술의 귀중한 유산인 불국사는 토함산 기슭에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보게 세워졌는데, 목조 건물은 임진왜란 때에 불타 버렸고, 신라 시대의 석조물과 기단은 지금까지 남아 있어 신라 불교 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현재의 불국사는 조선조 선조 26년에 부분적으로 중건하였으며, 1973년 복원 공사로 옛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불국사의 정문 앞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돌층계가 있어서 자하문과 대웅전으로 통하게 되어 있는데, 이 돌층계와 건물의 조화는 입체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대웅전 앞 좌우에는 3층 석탑인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는데, 석가탑의 소박하고 장중한 멋과 다보탑의 절묘한 기법과 우아한 선, 강약의 세련된 조화는 탑 예술의 최고의 미를 자랑하고 있다.
-석조물과 범종
이 밖의 석조물로는 경상 북도 월성군의 감은사지 3층 석탑과 전라 남도 구례군 화엄사의 4사자 3층 석탑 등이 있다. 석재를 사용한 조각으로는 경주에 있는 무령왕릉비의 이수(머릿돌)과 귀부(거북 받침)를 비롯하여 성덕 대왕릉의 호석들이 있는데, 사실적인 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불국사의 석등, 속리산 기슭에 있는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도 힘있고 균형이 잘 잡힌 조각으로 이름이 높다. 또 대왕암은 세계 최초의 수중릉으로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공예품으로는 범종을 들 수가 있는데,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의 동종과 경주 봉덕사의 성덕 대왕 신종이 유명하다. 특히 성덕 대왕 신종은 크고 웅장하면서도 선과 무늬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주조술도 뛰어나 세계 최고의 범종으로 일컬어진다.
신라의 멸망
▶ 신라사회의 지배구조는 골품체제를 바탕으로 하여 이와 유기적으로 연계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체제로 구축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 하대의 사회모순은 어떤 점에서는 골품체제의 구조와 운영의 모순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국가 형성과정과 맥을 같이하면서 형성된 골품체제는 그 운영에 있어서 기본적 한계를 보이면서 구조적 모순을 야기하게 되었다. 또한 진골 귀족들이 중앙에서 전쟁에 휩쓸려 있는 동안 지방의 호족세력들은 크게 성장하여 점차 왕실을 압도할만한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각기 백제와 고구려의 국가 부흥을 부르짖으며 견훤과 궁예가 궐기하였다. 927년에는 반란국가인 후백제의 왕 견훤이 군대를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리고 918년에 궁예를 쓰러뜨리고 즉위한 고려 태조 왕건이 정책상 한동안 신라와의 친선정책을 꾀하게 됨에 따라서 그 수명을 다소간 연장시킬 수 있었지만 고려가 후백제에 대하여 절대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되자 경순왕은 935년 11월 고려에 자진 항복하여 신라는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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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19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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