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과 여러 영화의 프로이드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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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며

1. 언어예술
1.1 속꿈과 밖꿈
1.2 한국문학의 분석

2. 영화예술
2.1 <박하사탕> 또는 <러브레터>
2.2 <사무라이 픽션> 또는 <나라야마 부시코>
2.3 <허리케인 카터> 또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
2,4 <언더 더 선> 또는 <지금은 통화중>
2.5 <아메리칸 뷰티> 또는 <눈을 크게 감고/아이즈 와이드 셧>

나오며

본문내용

해, 근친상간 등의 정신분석학적 소재를 마음껏 자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를 정신분석학에 대한 풍자로도 이해할 수 있다. 영화를 발현몽으로 보고 그 잠재몽을 캐보려는 헛된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수많은 정신분석학적 소재가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의 영혼을 치료해주는 인물로 설정된 사람이 리키다. 그리고 그는 가장 상처받은 영혼인 제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여 보관한다. 꿈에 등장하는 인물인 안젤라에 주목하는 관객과 달리 리키는 꿈을 꾸는 인물인 제인을 주목한다. 그가 정신병동에 수감되었다가 나온 인물이라는 설정 또한 흥미롭다. 정신분석학적 요인이 많은 영화에서 굳이 정신분석 의사에 가까운 인물을 찾자면 리키가 그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만큼 더욱 풍자적 성격을 갖게 된다. 영화관객의 엿보기 심리를 구현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리키는 그의 아버지가 믿듯이 동성연애자도 아니고 또는 그의 아버지처럼 부정적인 정신병 환자도 아니다. 엿보기를 꿈꾸는 사람은 오히려 관객 쪽이다. 뒤집어진 사회, 거꾸로 된 사회의 초상화가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리키라는 이름의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의 유아심리를 투사하는 관객의 전이심리가 사실은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관객은 스스로 믿듯이, 영화감독이 마련해준 자리에서 여유를 부리며 착각하듯 그렇게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오히려 관객의 노출되지 않은 복합심리가 '의사'에게 전이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며, 이 점이 이 영화의 뛰어난 연출효과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정신분석학은 겉보기에는 풍자의 대상이다. 그것은 이미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충분히 다루어졌던 사실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상업적 성공은 말하자면 그런 풍자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예술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차원을 뛰어넘는 자기 성찰의 시각, 즉 전이와 역전이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정신분석학의 시각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감독은 한편으로는 정신분석학을 상업화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창조적인 측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영화예술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영화예술과 정신분석학은 서로 충돌, 작용하며 발전하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눈을 크게 감고>는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소설 <꿈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원작의 충실한 재현이 성공적으로 실현된 영화에서 눈에 띄게 차이가 나는 대목은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꿈의 소설>이라는 제목에서 강조되어 있는 바로 그 꿈의 장면이다. 소설에서 알베르티네가 남편인 프리돌린의 요구에 따라 들려주는 꿈의 내용은 길고 복잡하여 영화로 만들면 훨씬 더 강렬한 효과를 낼 수 있었을 터인데도 말이다. 7장으로 구성된 소설의 제5장에서 밝혀지는 꿈의 내용에 주목한 독자는 영화에서는 더 큰 기대감으로 이 장면을 기다리기 때문에 그 실망감은 더욱 더 크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였던 관객이 영화를 보고 바로 이 대목에서 느끼는 실망감이 그렇다고 과연 헛된 것인가? 그럴 것이 꿈과 현실의 기막힌 상호 유사성이 확인되는 소설의 메시지가 바로 이런 실망감 그리고 그것에 뒤따르는 자기 성찰적 시각이기 때문이다. <배리 린든>과 <샤이닝> 등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통해 어떤 다른 감독보다도 문자예술과 영상예술의 자리차지와 자리바꿈의 역학관계에 주목했던 큐브릭은 마지막 유작에서 꿈의 영상을 생략함으로써 문자예술의 상상력이 문학 속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렇게 하여 영화예술과 문자예술 각각의 고유한 표현 가능성은 큐브릭의 연출을 통하여 그 성격이 훼손되지 않고 가장 효과적으로 살아 남게된 것이다.
00 나오며
21세기라는 새로운 도전적 시점에 이르러 정신분석학이 차지하고 있는 오늘의 좌표와 전망을 묻는 질문에 대해 필자는 정답을 피하고 우회로를 선택했다. 작품의 개별적 분석을 통한 이와 같은 접근에서 영화예술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정신분석학과 영화예술이 태어난 동일한 시대적 배경과 정신에 힘입은 바 크다.
종래의 문학과 정신분석학의 관계가 흡수와 패권의 논리에 따르고 있다면 영화예술과 정신분석학은 상대적으로 대결과 동반자의 길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산실이며 실험의 무대인 전이와 역전이의 불안한 현장감각과 그 상호 작용을 배제한 시각은 흡수와 패권의 현실적 논리에 근거한다. 크게 보아 조두영의 한국문학 분석과 고원의 영화 분석이 그 두 갈래의 구체적 표본으로 이 글에서 소개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명분으로 내세우는 이런 차이가 글에서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의 글이 프로이트를 빌려 속을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속이 아닌 밖에 대한 태도에서 두 사람의 글은 편차를 보인다. 이런 제한된 의미에서 전자가 문학의 정신분석학 또는 속꿈의 정신분석을 의도한다면 후자는 텍스트의 정신분석 또는 영화예술로 대표되는 밖꿈의 정신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텍스트의 정신분석은 환자의 정신분석도 아니며, 문학의 정신분석학도 아니다. 텍스트에 담겨진 의미를 캐묻는 작업에만 멈추는 것이 아닐뿐더러, 임상결과를 근거로 하여 발전되는 치료를 지향하는 정신분석학도 아니다. 분석의 현장은 주변적이며 유동적인 텍스트의 가지치기로서 실현되는 복잡한 움직임의 생산적 현장이다. 텍스트의 정신분석은 기존의 지배적 텍스트로부터 벗어나는 중심이동의 변화와 관계되는 갈등과 반응의 기록이며 바로 그 현장의 긴장감이 촉발하는 미지의 또 다른 가능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바꿈/밖꿈의 정신분석이다.
문학의 정신분석학이 속/권력을 선호한다면 텍스트의 정신분석은 상대적으로 밖/표현을 지향한다. 자리차지/속꿈 그 자체가 지배적인 한국의 문화 풍토에서는 자리바꿈/밖꿈의 정신분석학은 말할 것도 없고 속꿈의 정신분석마저 아직도 요원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속꿈의 지배는 문자언어에 대한 기득권을 가진 반동적인 계층의 소꿉/불장난으로 그치고 말 공산이 크다. 문제는 언어에 대한 생산적인 공간의 확보이며, 그것은 텍스트의 정신분석을 통한 오독과 가설이 실험적으로 집중될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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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5.04.20
  • 저작시기2005.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3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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