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의 전개와 그 시기의 경제정책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해당 자료는 10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0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문화대혁명의 전개와 그 시기의 경제정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1.문 화 대 혁 명
1) 문화 대혁명의 서곡
2) 문화대혁명의 발단
3) 문화대혁명의 전개
4) 문화대혁명의 결말
2. 문화대혁명기의 경제정책(1966~1976년)
1) 정책 목적과 내용
2) 문화대혁명기의 경제정책 배경설명
3) 경제정책의 특징
3. 문화대혁명 전ㆍ후기
1) 문화대혁명 전기(66년∼69년)의 경제
2) 문화대혁명 후기(70~76년)의 경제

결론
1. 문화대혁명체제하의 공업화 내용의 성과와 피해
2. 맺음말

본문내용

었으나 농촌 축적구조의 새로운 전망을 개척했음은 인정받고있다.
- 농촌의 상대적 안정
집단을 우위에 두는 농업정책의 전개와 지방고업화는 농촌잉여의 확대에 긍정적ㆍ부정적양면에서의 효과를 발생시키면서, 문화대혁명체제 속의 농촌에 일종의 상대적 안정상황을 만들어냈다. 식량생산은 문화혁명중인 1968년을 제하면 1966년부터 1979년까지 매년 증가하여 동기간에 34%증산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의 인구증가율(특히 농촌)은 높아서 1인당 식량소비량은 전국 평균으로나 농촌 평균으로나 1956년 수준을 하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노동자의 임금수준이 1966년 635위안에서 1979년의 605위안으로 계속 하락하였으므로 그것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농촌쪽이 안정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관철된 중공업 우선노선
1970년대의 중국은 국방과 경제발전 그리고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동요가 심했다. 미국의 베트남 침략확대와 남북 베트남의 저항강화가 중국에는 군사적 위협으로 비쳤고, 그것은 국경분쟁을 포함한 소련과의 균열의 확대와 함께 서방에의 급속한 접근의 계기로 작용하여 미ㆍ중 사이의 교류, 중ㆍ일 사이의 국교회복이 잇달아 실현되었다.
문혁기간 동안 경제정체와 그 사이에 확대된 서방세계화의 기술적 간격에 대한 반성적 인식은 전국인민대표회의 제4기1회회의(1975.1)에서 “금세기 안에 농업 공업 국방 과학시술의 근대화를 전면적으로 실현하여 우리나라의 국민경제를 세계의 앞열에 세운다(주은래)”는 구상을 다시 등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요청과 그 수행에 대하여 지도자들 사이에서 ‘정치우선’인가 ‘경제우선’인가를 놓고 대립이 확대되어 나갔다.
1970년도 계획이 제정됨으로써 “계급투쟁을 요점으로, 전쟁에 대비하는 방침을 정하고 국민경제의 새로운 비약을 촉구한다”는 표어를 채택하여, 1970년도 공업총생산약ㆍ기본건설투자를 전년대비 각각 17.46% 증가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이 새로운 약진의 수행을 위하여 1976년까지 1400만여의 농촌노동력이 도시로 이동했는데, 그것은 도시 지식 청년 1700만명의 농촌 변경지대로의 강제적 하방과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다.
경제정책의 적극적 전개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은 주자파(走者派)로 공격받았고, 도시와 공업의 분야에서 자본주의의 부활을 저지하기 위한 정치동원이 강화되어 나갔다.
요체가 된 조강(粗鋼)생산도 정치동원의 강화에 따라 흔들렸고, 분업ㆍ협업 체계를 부정하는 小而全 大而全
에 의한 노동생산성의 저하와 중공업편중에 의해 초래된 산업불균형,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재고의 증가는 적자결손 기업을 증가시켜 1970년 전국기업 결손 총액은 170억 위안에 달하였다. 기본건설투자의 효율악화도 표면화된으로써 국가의 재정수지를 악화시켜, 1976년에는 재정적자 50억여 위안, 국민소득 2.3% 감소하여 대약진기 이래 가장 큰 경제위기에 직면했다.
- 농업의 새로운 위기
농촌잉여의 확대라는 관점에서 보아 엄격한 농업정책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촌의 상대적안정을 지탱했던 것은 지방공업의 발전이었다. 사대기업이 확대되는 농업 내 축적자금으로 5소공업이 제공하는 농업생산재를 구입하고 그것은 농업생산력의 상승을 보증한다는 것이 바로 그들이 생각한 단순하고 이상적인 도식이었다.
농작물, 특히 식령경영의 수익이 저하하고 다수의 생산대가 결손을 내고 있다는 심각한 문제의 중요원인은 가격정책에도 있으나 오히려 지방공업 그 자체의 정체에 있었다 5소공업은 전체적으로 경영이 악화되어 1978년 단계의 결손액은 전국 공업기업 결손총약의 53%를 점하게되었다. 게다가 농업생산재가격은 국제시장과 비교하여도 상당히 높았고, 노동생산성이 낮은 지방공업의 제품은 대공제의 것보다도 품질이 나쁘고 가격이 비쌌다. 그것은 중공업 우선노선 아래에서의 지방공업화의 전개가 약속했던 새로운 축적구조의 형성이 좌절되었음을 의미했다. 문화대혁명 하의 경제는 공업과 농업 양면에서 파탄되어 나갔던 것이다.
2. 맺음말
모택동이 중국대륙을 ‘천하대란’으로 몰고 갈 때에 전세계는 곧 신기술과 경제발전의 고속성장시기로서, 2차대전 이후 두 번째로 산업구조의 상승 조정시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 일본은 1인당 국민소득에서 1965년의 미화 785달러였던 것이 1977년의 5177달러로 성장하여 세계적인 경제대국이 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한국과 타이완, 홍콩, 싱카포르도 신흥공업국으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중국 대륙은 발전은커녕 거꾸로 인위적으로 조성된 소모와 시간낭비로 이 중요한 10년을 낭비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10년간의 기간에도 전혀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모택동의 ‘전쟁과 기근에 대비하고 인민을 위하여’라는 구호하에 기술자, 노동자 및 인민군 간부와 사병, 전국의 인민들은 ‘제국주의ㆍ수정주의ㆍ반혁명주의자와의 시간을 다투는 싸움을 대비한 건설을 위하여 속도를 냈으며 3선지구의 건설에서는 개벽 이래 최대 규모의 철도 간선과 중요한 군사공업의 건설을 이룩했다. 1700여억위엔에 달하는 중ㆍ대형 기업 2천개를 일으켜세웠는데 이는 경제를 균등히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초가 되기도 했다.
종합적으로 볼 때 문화대혁명은 명칭과는 반대로 정치 경제를 포함하는 전면적인 대파괴였다. 대약진은 대퇴보였고 모택동이 발동한 문화대혁명은 그가 말한 대로 자본주의보다도 백배 천배 높은 무산계급의 신문화를 창출하지 못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오히려 문화의 대소멸, 대퇴보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현대화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경제ㆍ정치ㆍ사회와 문화 그 어느 분야로 보든지 문화대혁명은 현대화에 역행한 것이었다.
< 참 고 문 헌 >
# 히메다 미쓰요시 외. 김순호 옮김. <<20세기 중국사>> 1995. 돌베개
# 우노 시게아끼. 김정화 옮김. <<궁국공산당사>> 1992. 일월서각
# 엄가기, 고고. 최경수 옮김. 다큐멘터리 <<중국 문화대혁명>> 1988. 삼우당
# 짱쭈어 지음, 오재환 옮김 <<중국의 개혁 개방사>> 1966. 신서원
# 이케다 마코토 외, 김태승옮김 <<중국공업화의역사>> 1996. 신서원
# 유희문 외. <<현대중국경제>> 2000. 교보문고

키워드

  • 가격3,000
  • 페이지수30페이지
  • 등록일2005.10.20
  • 저작시기2005.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646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