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조건축의 구조와 삼국시대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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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서론 - 목조건축의 구조와 삼국의 건축
1) 가구법(架構)
2) 지붕의 유형
3) 한국의 공포양식

백제의 건축
1) 백제궁궐
2) 백제성곽

신라의 건축
1) 도성계획
2) 궁궐건축

고구려의 건축
1) 궁궐
2) 불사건축
3) 민가
4) 분묘

결론

본문내용

평양을 중심으로 대동강 유역에 산재하여 있고, 외형은 석총과 토총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 석총의 대부분은 붕괴되거나 석재가 다른 곳에 사용되어 버려 온전하게 남은 것은 장군총 뿐이다.
(1) 석총묘
① 장군총 - 장군총은 통구지방에서 가장 외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석총으로 외형은 석조7층의 방형단으로 형성되어, 단형 피라미드의 형상을 갖고 있으며, 상부는 높이 3척 정도의 만두형으로 되어 있다. 각층의 상면에서 수막새기와(남와당男瓦當) 기와의 형태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암키와(평기와)와 수키와(둥근기와)인데, 이 기와를 합쳐서 하나로 만든 것도 있다. 일반적으로 지붕은 산자 위에 진흙을 이겨 얇게 편 다음, 위 아래로 암키와를 걸치고 좌우의 이음매에 수키와를 덮는다. 그리고 처마 위에 비아무림으로 막새를 붙이는데 암키와 끝의 것을 암막새, 수키와 끝의 것을 수막새라고 한다.
와 암키와(여와女瓦)의 파편을 발견할 수 있어 처음에는 기와를 입혔을 것이라 추측된다. 한국의 건축 윤장섭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6 P.60
묘실은 폭 17.8척, 길이 18척, 높이 17척으로 벽은 대석재(大石財)로 견고히 쌓고, 상부천장은 하면 1.3척, 측면 3척으로 되게 한 단(段)을 내어 쌓은 다음, 한 장의 대석판으로 덮었다. 돌쌓기 공법은 매우 정교하며, 묘실 안의 석면에는 석회를 전부 발랐지만, 많이 벗겨져 있다. 총 각층의 내부 구조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고, 표면석재의 뒷면엔 석회를 넣어 견고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각층상면에는 수막새기와와 암막새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수막새기와에는 한식(漢式)에 가까운 연화문양(蓮華文樣)이 있고, 암키와는 정교하게 만들었고 문자를 음각(陰刻)한 것이 있다.
② 태왕릉 - 태왕릉(太王陵)은 장군총보다 훨씬 큰 규모를 가진 대석총묘이지만 지금은 붕괴되어 큰 돌더미가 되어 있다. 기단부, 즉 제 1층은 대석재로 7단을 쌓아서 만들었고, 묘실은 정남을 향하였다. 기단부에 쌓았던 큰 석재들을 운반하고 견고하게 석총을 축조하였던 것은 당시 고구려의 건축기술이 발달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석총이 무너진 석괴 더미 속에서 만든 벽돌기와조각(塼瓦片)이 발견되었으며, 벽돌에는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자(銘字)가 들어 있어, 태왕릉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여기서도 수막새기와가 발견되었으며, 암막새기와에 해당하는 기와조각도 발견되었다.
(2) 토총묘
토총은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 널방벽〔玄室壁, 主室壁〕 한쪽에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가 설치되어 있는 무덤형식. 굴식돌방무덤이라고도 한다. 형태구조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으나, 보통 주검을 안치하는 널방과 널방 앞에 외부에서 널방으로 통하는 널길〔羨道〕을 구비하고 있는 점이 구조형식상 중요한 특징이다
을 봉토(封土)로 덮은 것이며, 봉토의 외형은 원형이 많고, 방형 및 방추대형(方錐臺形)도 사용되었다. 묘실의 평면은 일반적으로 전실(前室)과 주실(主室)이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 통구의 삼실총(三室塚)과 같이 묘실 세 개가 ㄱ자로 연결되어 있어, 다실묘(多室墓)로 된 것도 있고, 전실 없이 단실묘(單室墓)로 된 것도 있다. 토총의 묘실은 천장가구(天障架構)가 특이하며, 일반적 방식으로는 벽상부를 2~3단 내어서 쌓고 모서리에 삼각형의 석재를 걸쳐서 내 쌓는 방법을 2~4단 되풀이하여 좁혀서 쌓아 올린 뒤, 정부(頂部)에 천장석판을 놓는 방법으로 말각조정천장(抹角藻井天障)이라고 부르는데, 이와 같은 공법은 서아시아에서 중앙 아시아와 화북을 거쳐 고구려로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한국에서는 고구려 사람들만이 즐겨 이 공법을 사용해 매우 특이한 점으로 꼽힌다.
결론
이상으로 목조건축의 구조와 삼국시대의 건축을 살펴보았다. 삼국시대는 수확물의 다과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보호자와 피 보호자의 형태로 발생되었다. 이들의 집단을 다른 집단으로부터의 약탈,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 방위시설인 성곽(城郭) 건축이 나타나고 재배 경제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원시종교로 인하여 종교건축도 나타나게 되어 건축의 종류도 시대를 거침에 따라 점점 다양해지고 발달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북방에 위치한 고구려는 외국의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 가장 독특한 문화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문화를 다시 백제나 신라 및 여러 한반도 남부의 국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건축문화는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에게 전해졌다. 지금은 한반도 남부의 백제나 신라 등의 건축물들이 남아있고 북방에 위치한 고구려의 건축문화가 많이 사라져 있는 실정이지만 삼국시대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주변국가들에게 문화를 전해주었고 타민족과 다른 독특한 건축문화를 형성하였다.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떨어져 나온 민족으로 초기에는 고구려와 거의 흡사한 건축 구조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나 도읍을 남방으로 천도한 후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 속에 중국 남조의 부드럽고 우아함의 영향을 받아 점차 발달해 갔으며 이는 신라와 일본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일본의 호류지는 백제의 공장들이 넘어가 지었으며 신라의 황룡사 역시 백제의 공장이 직접 지휘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 백제의 수준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받아들인 국가로 가장 늦게 통일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고구려와의 교류를 통해 신건축에 의한 목조건축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 후 신라는 삼국간의 분쟁을 거듭하는 과정에 당과의 교류에서 당의 목조건축의 양식을 도입하게 되었으며 고구려에서 도입된 경직 장중한 북조 계통의 건물에서 새로운 양식인 당 양식의 목조로 넘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신라는 오히려 그 고유의 문화 특성을 지켜나간 국가였다. 비록 외부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의식이나 기술을 잘 흡수 소화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문화적 역량이 뛰어난 민족이었다. 왕권강화를 위한 호국적 성질을 띈 불교는 이러한 문화 발전을 이룩하는 배경이 되었고 그 속에서 소박하고 단아한 신라의 문화가 발전하였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많은 유적들이 현존하지 않아 어려운 부분도 많았고, 고구려 건축 같은 경우는 구할 수 있는 자료가 극히 한정적이라 아쉬운 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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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06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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