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암(如菴) 최린(崔麟)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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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암(如菴) 최린(崔麟) 평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내용소개(1920년대를 중점으로)
1) 인물소개
2) 내용요약
3) 저자소개

3. 내용비평
1) 주요활동 및 해석
2) 그의 활동노선평가

4. 1930년대 이후 최린의 행적

5. 결론

6. 참고문헌

본문내용

1차 세계대전 이후 변하는 국제정세의 힘입어 3·1운동을 주도하나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3년간의 옥살이를 겪으면서 결국 현실과 타협하여 독립보다 그나마 현실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자치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지배정책을 문화정치로 바꾼 총독부의 계략과 어울려 결국 최린의 자치운동은 총독부의 관리들에 의해 유린당하고 만다. 그의 논리는 먼저 실력을 양성한 후에 단계적으로 독립을 준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수준을 독립운동에서 자치운동이라는 몇 단계를 낮춘 점은 시작에서부터 일본의 감시를 받으며 진행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졌다. 그래서 이후 총독부의 도움이 없어지자 자치운동은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그의 20년대의 활동노선을 평가하자면 반일도 아니고 친일도 아닌 중도적이고 완충적으로 자기의 독특한 정치적 색깔을 띠고 활동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자치운동은 실패하게 되고 일제와 타협적인 성격을 띤 그의 자치운동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지친 그에게 일제의 파쇼화논리에 회유되는 데 용이하게 작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4. 1930년대 이후 최린의 행적
최린의 자치운동은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고 일제의 파쇼화정책이 노골화되면서 완전히 실패하게 되고 만다. 당시 일제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동원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최린을 이용하려 회유하였고 사상적으로 흔들리고 있던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1933년 대동방주의를 주장하며 전향선언을 하면서 본격적인 친일행각을 시작한다. 친일문제연구 편집위원,《친일변절자 33인》, 가람기획, 1995, p.301.
그 후 1934년 중추원참의직을 수락하고 시중회(時中會)를 조직하여 일선융합을 주장한다. 1937년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동양평화의 대 정신’이라는 연제 하에 내선일체(內鮮一體)로 국민적 적성을 발휘할 것을 외쳤으며 내선일체, 성전완수를 강요하는 등 충성스런 황국신민이 될 것을 선동하였다 반민족문제연구소,《친일파 99인 3》, 돌베개, 1993, p.159.
. 한편 1940년대에 이르러 전시체제가 한층 강화되자 결전체제로 끌어올리기 위해 내선일체와 전시경제체제의 완성을 목표로 설립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가 된다. 1941년 김동환과 함께 전시체제 하에 자발적인 황민화운동을 하기 위해 임전대책협의회를 조직한 뒤 각지에서 강연행각을 벌였다. 최린은 임전대책연설회에서 ‘읍소(泣訴)’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조선 사람은 희생심이 부족한데 이 비상시국을 희생적 각오로 떨쳐 일어서야 할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또한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과 통합하여 조선임전보국단으로 재발족할 때 그는 회장에 취임하였고 각지를 돌며 일제를 찬양하는 연설을 한다. 최린은 조선임전보국단의 주최로 열린 미·영 타도 대 연설회에서 “루즈벨트여, 귀가 있거든 들어보라. 내가 윌슨에게 민족자결주의에 속아 천황의 반신노릇을 하였다. 이 절치부심할 원수야! 이제는 속지 않는다. 나는 과거를 모두 청산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라."라고 까지 하여 자신이 주도했던 독립선언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온 1945년까지도 조선언론보국회를 결성하여 본토결전작전에 호응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한 후 그동안의 친일행각의 대가로 천도교에서도 출교되었으며 1949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다. 그 후 1950년 6·25사변이 발발하자 그는 북한당국에 의해 친일파라는 죄명으로 또다시 체포되었고 평양 감옥에 수감되어있다는 소식을 끝으로 행적이 묘연하다.
5. 결론(느낀 점)
최린은 일제시기를 살았던 타협적이고 종속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의든 타의였든 간에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하면서 조선민중들에게 투철한 반일주의자이자 위대한 조선의 지도자로 여겨졌다. 그러한 그가 3·1운동 이후 3년간 옥살이를 겪으면서 사상적으로 변화를 겪게 된다. 비록 그가 재판과정에서 한 말을 곧이 믿으면 앞의 내용비평에서와 같이 3·1운동 전에도 조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나는 최린이 1930년대 들어 변절을 해 친일행각을 벌였다고는 하지만 민족대표 33인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당시만은 투철한 반일주의자 위대한 조선의 지도자였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그는 출옥 후에 총독부와 타협하면서 자치운동을 주도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한계와 좌절될 운명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정책이 파쇼화정책으로 바뀌자 자치운동은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그 후 최린은 민족대표였다는 영광스런 과거를 버리고 변절의 길을 선택했다. 변절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먼저 그는 자치운동의 실패 후 몸적이나 심적으로 많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한 상태에서 내선일체사상이 타협점으로 보였으며 아시아에서 승승장구하는 일본의 모습은 극복의 대상을 넘어 경외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불가능한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인으로 동화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패배주의적 사고는 사회 진화론적 입장에서의 자국문화에 대한 열등감과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식 결여의 산물이다. 따라서 이러한 잘못된 사고는 최린을 비롯한 당대 지식인을 친일의 길로 인도하였으며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겼다. 여기서 우리는 최린의 삶을 통해 올바른 사고가 없이는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할지라도 결국 잘못된 결과를 낳게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6. 참고문헌
1) 김동명, <일제하 동화형협력운동의 논리와 전개>,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제21 집》, 2003.
2)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3) 친일문제연구 편집위원, 《친일변절자 33인》, 가람기획, 1995.
4)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3》, 돌베게, 1993.
5) 임종국,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6.
6) 강만길,《한국사 15》, 한길사, 1994.
7) 박찬승, 《한국근대 정치사상사연구》, 역사비평사, 1992.
8) 이균영,《신간회연구》, 역사비평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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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0.06
  • 저작시기20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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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6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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