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버스의 신대륙발견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해당 자료는 10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0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콜롬버스의 신대륙발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른 출구가 없었기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 밀려가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2월 16일 최악의 상황을 극복했을 때, 육지가 보였다. 가까스로 파멸에서 벗어난 선원들 앞에 아조레스 군도의 제일 남쪽에 있는 산타 마리아 섬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주 뒤 2월 24일에 그가 다시 돛을 올리게 하였으나 또 다시 허리케인에 휩싸였다. 이 허리케인은 전에 만났던 것보다 위력이 더했으며 니냐 호를 한 주 동안 공깃돌 가지고 놀 듯 하다가 포르투갈 해안 앞으로 끌어왔다.
3월 13일 "아메리카의 발견자"가 리스본을 출발하였고, 3월 15일 니냐 호가 팔로스 항에 당도하였다. 도착과 함께 그가 그때까지 성실하게 기록한 『항해일지』도 끝났다. 그는 마지막 기록에서 다시 한 번 "여왕 폐하의 궁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나 모두 나를 반대하고 이 사업을 바보짓으로 간주하는 많은 인사들의 진언에 맞서싸웠음"을 힘주어 언급했다. 바로 이어지는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비록 그 일이 그토록 힘들이지 않고 이루어지긴 했으나 기독교 신앙에 큰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기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소망한다."
◎ 참고문헌
『콜럼버스』, 윤도중 옮김, 한길출판사, 1998
『대항해자의 시대(탐험의 세계사?)』, 김신, 두남출판사, 1997
『위대한 탐험』, 이병철, 가람기획, 1997
『세계의 인간상 5』-신대륙의 기수 콜롬버스, 마다리아가 , 유공희 역, 신구문화사, 1963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영어: Christopher Columbus, 이탈리아어: Cristoforo

Colombo, 1451년 경 - 1506년 5월 20일)는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항해가이다.
1451년 이탈리아의 해안 도시 제노바에서 태어났으며 부유한 양모 직조공의 아들이다.
<제노바> 22살까지 제노바에 살았던 콜럼버스는 지중해를 통해 동양과 해상 무역을 하는 무역선들을 보며 동양에 대한 탐험의 꿈을 키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안 도시 태생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항해에 종사하였다고 하며, 천문, 지리학자들과의 잦은 교류로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서쪽으로 가면 인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수학자 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地圖)를 구해 연구한 결과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1477년, 제노바를 떠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정착하였다.
<25살 때의 콜럼버스>
<그시대의 대서양 관념>그는 1484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에스파냐로 갔다. 당시 에스파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정치, 지리,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던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이사벨이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이사벨과 페르난도와 콜럼버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였고, 그가 발견하는 것의 10%를 콜럼버스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 하에 선박 2척(핀타호와 니나호)를 내주고 과거에 죄를 지은 자들은 면죄를 해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해 주었으며, 또 팔로스항에 사는 핀손이라는 선장이 자기 소유의 선박인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계약 후에도 이사벨 여왕이 계속 지원을 미뤘기 때문에, 실질적인 항해까지 걸린 시간은 6년이나 되었다.
콜럼버스의 항로는 총 4차례나 아메리카 대륙을 항해하였는데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한 건 그 중 제 1항해의 일이다.
제1회 항해의 출범은 1492년 8월 3일이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Bahamas)에서 와틀링 섬(추정)을 발견하고, 이 섬을 산 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의 섬(Holysavior)이라고 칭하였다. 이 날은 아메리카 역사 사상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있는 날 중 하나다. 이어, 그는 쿠바·히스파니올라(아이티, Haiti)에 도달하여, 이 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 칭하였다.
이 후 항해 도중, 산타 마리아호가 파손 되어 한 섬에 약 40명의 선원을 남긴 후에 히스파니올라(후 스페인)라고 이름지었다.
<육지를 발견한 콜럼버스>
<원주민과 마추친 콜럼버스>
1493년 3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고, 당시 그가 가져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
<보고하는 콜럼버스>
17척에다 1,500명의 대선단에 의한 제2회 항해(1493)는 그의 선전에 따라 금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히스파니올라에 남겨 두었던 식민자는 전멸해 버렸으나, 콜럼버스는 여기다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토지를 에스파냐인(人) 경영자에게 분할해 주고 인디언들에게는 공납(貢納)과 부역(경작과 금 채굴)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학대 ·살육하고, 노예화하였다. 이 항해에서 에스파냐로 보낸 산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오자(1496) 문책당하였다.
<살육현장으로 변한 식민지>
제3회 항해(1498∼1500)에서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오리노코 강 하구(河口)를 발견하였으나,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화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오리노코강>제4회 항해(1502∼1504)의 허가는 바스코 다 가마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때문인 것으로 보이나, 그 사정은 명백하지 않다.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 가장 고생스러운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는 1506년 자기가 발견한 토지를 인도라고 믿으며 죽었는데 그의 서인도 항로의 발견으로 인하여 신대륙이 비로소 유럽인들의 활동무대가 되고, 식민지화 된 후, 새로운 나라들이 생겨났으니 아메리카 대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젊을 때의 콜럼버스>
<말년의 콜럼버스>

키워드

  • 가격3,000
  • 페이지수38페이지
  • 등록일2007.05.29
  • 저작시기2007.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1199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