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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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엘리자베스여왕
2. 엘리자베스여왕의 생애
3. 엘리자베스여왕의 업적
4. 엘리자베스의 남자들

Ⅲ. 결론

본문내용

데 이 의문의 사망이 “여왕과 더들리가 결혼하려고 롭서트를 살해 한 것”이라는 소문으로 여왕의 입지가 매우 난처해진 것이다. 메리 스튜어트 같았다면 보스웰과 결혼한 것과 같이 신경조차 쓰지 않고 결혼 제단에 올랐겠지만 엘리자베스는 소문들이 자신의 명예와 왕권 심지어는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죽을 때까지 여왕 부군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엘리자베스의 가장 많은 애정과 경제적 보상을 받은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성관계가 없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거의 부부처럼 살았다.
2) 월터 롤리
비록 최고의 자리는 거의 대부분 더들리가 차지했지만 그 바로 밑에서 역시 여왕의 사랑을 받으며 더들리의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월터 롤리는 데번셔 출신인 그는 정치가라기보다는 무인이자 탐험가로 아메리카를 탐험해 버지니아이라는 이름을 붙인 인물로 유명하다 물로 책 읽은 것을 즐기고 매우 아름다운 시로 여왕을 찬미했으면 자신의 외투를 진흙땅에 깔아 여왕의 발이 더렵혀지는 것을 보호하는 등의 낭만적인 행위로 했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검들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더들리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더들리처럼 사악한 인물이라는 평은 듣지 않았지만 거친 말투와 신랄한 혀. 오만함 따위 때문에 항상 인간관계가 삐거덕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비판을 받아들지 않았고 오히려 남을 모욕하는 것을 즐겼다. 이런 성격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그를 총애하면서도 중책을 맡기지는 않았다.
3) 로버트 데버루
로버트 더들리가 1588년에 죽고 월터 롤리 등 옛 총신들이 점차 빛이 바래가고 있을 부쳐 여왕의 노년에 마지막 총신으로 떠오른 사람이 바로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였다. 엘리자베스의 총신들이 그렇듯이 잘생긴 외모와 정중한 태도 세련미를 지닌 그는 단번에 여왕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의 총신들이 경솔함 보다 훨씬 더 경솔한 사람이었다. 예전의 총신들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어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후원자인 여왕에게 매달렸던 데 반해 에식스는 군중에게 인기가 매우 좋았고 추종자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다. 이런 인기를 등에 업고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거칠게 대했다. 자기 마음대로 상황이 진척되지 않거나 여왕이 한마디 질책이라도 할라치면 버럭 화를 내면서 궁정에서 떠나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자중할 줄 몰랐던 그는 언제까지고 자신이 어떤 짓을 하던 여왕에게 용서받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에식스에게 엘리자베스는 군자가 아니라 언제까지 응성을 부리고 마음대로 해도 좋은 늙은 여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에 대한 지극한 애정으로 모든 것을 용서했지만 자존심이 그토록 높고 왕권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그녀에게 에식스의 이런 모습에 나중에는 에식스가 모욕을 받아도 “그는 그럴만했다”고 냉소적으로 말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애정으로 그를 대했으나 나중에는 애정 반 그가 가지고 있는 인기와 힘을 무시 못 하는 불안감 반이였지만 후에는 오직 불안감으로 그를 대하게 되었다. 이전의 총신들은 상승과 파멸과 오직 엘리자베스의 의중에 달려있었으므로 결정하기 쉬었지만 에식스는 인기가 높고 세력이 많아 엘리자베스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에스파냐 원정 실패에 더불어 아일랜드 원정까지 완벽한 실패로 끝나자 조금이나 남아있던 에식스에 대한 여왕의 애정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동안 그에게 대한 모습과 다른 모습 ,그에게 엄청난 분노와 질책이 내려지자 놀라 불안에 떨던 그는 결국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에게 간 뒤로 군사를 일으켜 1601년 결국 여와의 마지막 총신은 처형대에서 죽음 맞았다.
Ⅲ. 결론
엘리자베스는 한 나라의 여왕, 즉 여성으로써 영국사회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해준 그녀는 무수한 결혼설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결혼하지 않았던 이유는 정치적 이였다. 자신의 총신들에게는 많은 점을 베풀어 주었지만 자신의 군주로서의 권한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권한이 흔들리는 것을 걱정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결혼과 관련된 모든 정치적 상황을 “나는 이미 잉글랜드란 나라와 결혼했다‘라는 언급을 통해 민중들의 신뢰와 함께 강력한 통치권을 소유 할 수 있었다. 이로써 엘리자베스여왕은 ‘선녀여왕’, ‘처녀여왕’으로서 영광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제국의 태양)엘리자베스1세』, 앤 서머싯 지음/남경태옮김/들녘출판사 2005
『영국사』-김현수 대한교과서 2007
  • 가격1,8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7.07.12
  • 저작시기2007.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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