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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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약 력
2. 생 애
3. 주요 활동
1) 경 제
2) 국토 개발
3) 국 방
4) 외 교
5) 남북 관계
6) 과학 기술 개발
4. 유신 체제와 개발 독재
1) 유신체제의 성립
2) 유신체제의 성립배경
3) 유신체제의 특징
4) 체제의 전개와 붕괴
5.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

Ⅲ. 결 론 - 박정희의 일생과 역사적 평가에 대한 나의 생각

본문내용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인이 서울민사지법에 제출한 것으로, 그 사유는 다원 자격과 대의원 자격이 없는 22명이 신민당 총재를 선출하는 투표에 참여했기 때문에 김영삼의 총재 당선이 무효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공작은 오히려 신민당을 자극하여, 유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투쟁의지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9월 16일 김영삼은 뉴욕 타임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미국정부가 유신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YH사건'과 '신민당 총재단에 대한 직무정지가처분' 등 연속적인 여야간의 대치 국면에서 김영삼의 기자회견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자, 정부 여당은 즉각 공격에 나섰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8월 22일 '김영삼 의원 징계동의안'을 국회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10월 4일 경호권 발동으로 백명의 무술경위를 출동시킨 가운데 국회 별실에서 김영삼 의원의 제명 안을 통과시켰다. 김영삼 총재에 대한 의원직 제명은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부마항쟁'이란 유신정권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제명시킨 후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 발생한 격렬한 항의시위를 말한다. 10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부산대와 동아대 학생 및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고, 이 같은 시위는 곧 마산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박 정권은 경찰력으로는 도저히 사태를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여단 병력을 투입하여 시위군중울 해산하였다.
부마항쟁으로 박정희 정권은 국제사회에서 더욱 고립되었고, 그 동안 학내집회, 교내시위에 머물던 학생들의 투쟁이 가두시위로, 시민봉기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부마항쟁은 유신체제를 박정희의 암살로 이어졌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견고해 보이던 체제 내부에 심각한 분열현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부마항쟁에 직면하여 권력 내부에 정책상의 강·온 대립이 촉발되고, 이것이 권력투쟁으로 진전되었으며, 마침내 박정희 피살과 체제의 와해로 이어졌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숨을 거두었다. 유신의 창안자였으며 관리자였던 박정희의 죽음은 유신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김재규의 총탄이 유신붕괴의 근본적 요인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유신체제의 몰락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몇 가지 요인들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유신체제 붕괴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체제성격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권위주의적 통치는 저항세력을 낳았고, 반복되는 공포정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항세력의 정당성과 조직력을 키워주는 역효과만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경제적 위기도 유신체제 붕괴의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체제의 정당성의 근거는 지속적 경제성장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야기된 경제적 위기는 빈약한 정당성의 근거마저 고갈시켜버렸다.
5.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
박정희에 대한 현재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그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박정희에 대한 긍정 적인 평을 하는 의견들은 보통은 경제 분야에서 이룩한 일련의 업적과 관련하여 우리나라를 후진국이라는 입장에서 개발도상국의 위치까지 이르게 하였으며,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주국방의 길을 열기 위한 노력했던 모습에서 민족주의자로서의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점에 대한 비판의 의견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 식의 산업화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형태의 산업화도 가능했을 것이고, 일련의 경제발전의 성과의 공을 일개 개인의 정치 지도자에게 모두 환원 시킨다는 것도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현장에서 노력했던 노동자야말로 경제발전의 최대 공로자이고,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박정희가 민족주의자라는 의견에 대해서 비판하는 입장은 진정한 민족주의자라면 남한의 발전만을 내세우기보다는 북한을 포용하여 민족 전체의 번영과 발전을 도모하는 원대한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박정희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부분이 정치적 리더십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박정희의 카리스마적인 정치 리더십에 대한 평가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점에 대해서도 박정희의 리더십에 숨어 있는 아집과 독선으로 볼 수 있다.
Ⅲ. 결 론 - 박정희의 일생과 역사적 평가에 대한 나의 생각
이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생애와 경제 성장에 대한 치적 사항, 또 유신체제를 통한 개발독재 등에 대해 알아보았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정말 극과 극의 평가가 대립된다. 그렇다고 해서 양자의 입장 모두 틀린 주장 이라고도 할 수 없다. 사실 모두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에 가치를 둔 입장에서는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최고의 지도자로 추앙되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중요시 하는 입장에서는 박정희는 말 그대로 독재자일 뿐이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을 평가할 때면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현재처럼 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생각해보면 박정희 같은 대통령이 다시 나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경제 성장만을 위해 국민의 인권을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짓밟는 그런 행위는 더 이상 우리나라에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칭찬할 것은 칭찬하고 욕할 것은 욕하자는 것이 일반적인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이때, 더구나 이제 취업을 앞둔 나로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성장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대선이 한 달 남짓 남았다. 지난 노무현 정부를 탓하지는 않지만 경제 상황이 안 좋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다음에 당선될 대통령은 침체되어 있는 우리나라 경제 상황을 좀 더 밝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출 처 및 참 고 자 료 -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2006, 김형아, 일조각)
근대의 경계에서 독재를 읽다(2006, 장문석ㆍ이상록, 그린비)
박정희 시대와 한국 현대사(2006, 정상화, 선인)
네이버 백과사전(http://100.naver.com/)
네이버 인물검색(http://people.naver.com)
박정희 대통령 인터넷 기념관(http://www.516.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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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2.09
  • 저작시기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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