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사업의 개요
-사업의 내용
-사업의 배경 및 목적
-사업의 필요성
-사업의 기대효과
2. 사회,경제환경
-도로 현황
-자동차 등록현황
-사업지 주변 교통현황
-주요 가로구간 평균통행속도 및 서비스수준분석
-사업시행으로 인한 영향예측
-사업 시행시 주변가로 및 교차로 서비스수준 분석
-저감방안
3. 문화재
4. 지역 대표적 명승지
5. 영향평가를 하며 느낀점
-사업의 내용
-사업의 배경 및 목적
-사업의 필요성
-사업의 기대효과
2. 사회,경제환경
-도로 현황
-자동차 등록현황
-사업지 주변 교통현황
-주요 가로구간 평균통행속도 및 서비스수준분석
-사업시행으로 인한 영향예측
-사업 시행시 주변가로 및 교차로 서비스수준 분석
-저감방안
3. 문화재
4. 지역 대표적 명승지
5. 영향평가를 하며 느낀점
본문내용
옮겨지고 명종이후 다대포 만호영은 부산포와 같은 진(鎭)으로 승격되었다. 임진왜란 이후는 부산포진과 함께 그 중요성에 비추어 딴 진보다 2배의 병선을 가지게 되면서 다대포진의 첨사는 북경(北境)의 만포진첨사(滿浦鎭僉使)와 같이 정 3품 당상관이 임명되었다. 이 다대포진 객사의 창건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1970년 몰운대로 옮겨지고는 산꼭대기에 벽체가 없이 서서 누대 같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바. 정운공 순의비 (鄭運公 殉義碑)
정운공 순의비는 1972년 6월 26일 지방문화재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으며, 다대동 산 144번지인 몰운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의 주인공인 정운(鄭運)은 1543년 훈련원 참군 응정(應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창진(昌辰)이었다. 영암이 본 고향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거산도찰방, 웅천현감을 거쳐 제주판관 때 목사(牧使)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전라좌도 녹도(鹿島) 만호(萬戶)에 기용돼 있었다. 이 녹도 만호일 때의 1592년 9월 1일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해전에서 일본 병선 400여척과 싸워서 100여척을 격파할 때 이순신 장군의 우부장(右部將)으로 군사의 맨 앞장서 분전하다가 적탄을 맞고 순절하였다.
1798년에 정운공의 8대손 정혁(鄭爀)이 다대포 첨사로 부임하여 그 임지내의 명소인 몰운대를 택해 정운공의 공덕을 추모하는 순의비를 세웠는데 이조판서 민종현(閔鍾顯)이 비문을 짓고 훈련대장 서유대(徐有大)가 글씨를 썼다. 비면에는「忠臣 鄭運公 殉義碑」8자가 적혀 있고, 비음(碑陰 : 비신의 뒷면)에는 18행(行)으로 정운공의 순절사적(殉節事蹟)을 소상하게 밝혔다. 비문에는 정운공이 수군 선봉으로 몰운대 아래서 왜적을 만났을 때 몰운(沒雲)의 운(雲)자가 자기 이름자인 운(運)과 음이 같다하여 이곳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고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충장공 실기(忠壯公 實記 : 정운의 시호는 충장이었다)와 충무공 전서(忠武公 全書)에는 정운공은 부산포 해전에서 순절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동안 비석만 서 있었는데 1974년 부산시가 비각(碑閣)을 세웠으며, 이 비석은 높이 172㎝, 넓이 69㎝, 두께 22㎝ 규모이다.
사. 윤공단 (尹公壇)
윤공단은 1972년 6월 26일 지방문화재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다대동 산 24번지(다대1주공 APT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공과 함께 싸우다 순사한 군민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1766년 다대첨사 이해문(李海文)이 다대객관의 동쪽에 설치한 제단(祭壇)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14일 부산진성(釜山鎭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군사를 나누어 다대포진(多大浦鎭)과 동래부(東萊府)를 공격하였다. 이때 다대첨사 윤흥신은 동생 흥제(興梯)와 군민을 이끌고 막강한 무리의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일설에는 첫날 왜적은 다대포진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윤공이 힘을 다해 물리 쳤다고 한다. 그 이튿날 적이 다시 공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였으나 적의 공격이 전날보다 더 격렬하여 마침내는 그 모두가 순사하였다는 것이다. 원래 이 단은 다대포 첨사영의 성내였던 지금의 다대초등학교에 있었던 것을 1970년 12월 5일 현재의 자리인 다대동 산24번지로 옮겼다. 비석 앞면에는「僉使 尹公 興信殉節碑」가 음각돼 있으며 뒷면에는 공의 전적이 기록되어 있다. 이 윤흥신공의 비석 양쪽에는 의사 윤흥제비(義士尹興悌碑)와 순란사민비(殉亂士民碑)가 세워져 있다. 현재 제향은 동민 중심으로 음력 4월 15일에 거행되고 있다.
아. 응봉봉수대(鷹峰烽燧臺)
봉수대(烽燧臺)는 지금의 다대동 북쪽의 아미산에 있으며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통신시설이다. 봉수는 변경지방(邊境地方)에서 일어난 긴급한 정황을 중앙 또는 인근의 군사기지에 알리는 군사상의 목적으로 설치 사용된 것이다.
대략 230리의 거리를 두고 후망(侯望)의 요지가 되는 산봉우리에 봉수대 (烽燧臺 : 烽火臺, 煙臺)를 두어 밤에는 횃불을 밝히고, 낮에는 연기를 내어 인근의 봉수대에 연락했다.
평시에는 일거(一炬, 낮 : 一煙), 적이 나타나면 2炬(二煙),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炬(三煙), 경계를 침범하면 4炬(四煙), 적과 접전하면 5炬(五煙)로 차례로 서울까지 연락하였다. 영남은 다대포가 출발점이 되어 동래 황령산을 거쳐 영천, 안동, 충주를 경유 광주(廣州)를 통하여 최종점인 서울 남산까지 이 신호는 전해졌다.
봉수대는 국가의 중대한 업무의 하나이므로 수령이 봉수군(烽燧軍) 후망(侯望)의 실태를 감독하고 이와 연대책임을 졌다. 다대포 응봉봉수대에 도별장(都別將) 1인을 두었고, 그 밑에 별장(別將) 6명을 두었고, 감고(監考)는 1명, 봉군(烽軍)은 10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봉수대를 관할하는 기관은 다대진(多大鎭) 이었다. 다대포 응봉봉수대를 비롯 황령산(荒嶺山), 계명산(鷄鳴山), 간비오산(干飛烏山), 구봉(龜烽), 오해야(吾海也), 석성(石城) 등 7개의 봉수대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 시에 그 기능을 발휘한 바도 있어서 이 유지(遺址)는 국방의식의 앙양 이란 점에서 중요시되는 문화유산이다. 다대포 봉수대는 1977년 수축(修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환경학도의 입장에서 명지대교 건설사업을 본다면
부산항과 부산신항을 연결 신속한 물류이동으로 국가 경쟁력 제고, 부산광역시 해안순환도로망과 국가기관 도로망 연계 구축, 낙동강 동,서쪽 연결 교통로 확충으로 교통난 해소 등 사회, 경제환경측면의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반면, 세계적으로 5개 보호지역으로 묶일만큼 생태적으로 가치가 큰 지역은 그리 흔치 않을 거라고 생각된다. 정부가 그 보호가치를 인정하여 보전지역으로 지정한 만큼 설사 국가적으로 아무리 중요한 국책사업이라 할지라도 개발허가를 내 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물며 명지대교 건설은 민자사업이며, 지방정부의 주장과 개발요구에 보전지역이 해제될 수 있는 거라면 이후 환경적으로 필요한 보전지역들은 하나도 지키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된다.
바. 정운공 순의비 (鄭運公 殉義碑)
정운공 순의비는 1972년 6월 26일 지방문화재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으며, 다대동 산 144번지인 몰운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의 주인공인 정운(鄭運)은 1543년 훈련원 참군 응정(應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창진(昌辰)이었다. 영암이 본 고향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거산도찰방, 웅천현감을 거쳐 제주판관 때 목사(牧使)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전라좌도 녹도(鹿島) 만호(萬戶)에 기용돼 있었다. 이 녹도 만호일 때의 1592년 9월 1일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해전에서 일본 병선 400여척과 싸워서 100여척을 격파할 때 이순신 장군의 우부장(右部將)으로 군사의 맨 앞장서 분전하다가 적탄을 맞고 순절하였다.
1798년에 정운공의 8대손 정혁(鄭爀)이 다대포 첨사로 부임하여 그 임지내의 명소인 몰운대를 택해 정운공의 공덕을 추모하는 순의비를 세웠는데 이조판서 민종현(閔鍾顯)이 비문을 짓고 훈련대장 서유대(徐有大)가 글씨를 썼다. 비면에는「忠臣 鄭運公 殉義碑」8자가 적혀 있고, 비음(碑陰 : 비신의 뒷면)에는 18행(行)으로 정운공의 순절사적(殉節事蹟)을 소상하게 밝혔다. 비문에는 정운공이 수군 선봉으로 몰운대 아래서 왜적을 만났을 때 몰운(沒雲)의 운(雲)자가 자기 이름자인 운(運)과 음이 같다하여 이곳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고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충장공 실기(忠壯公 實記 : 정운의 시호는 충장이었다)와 충무공 전서(忠武公 全書)에는 정운공은 부산포 해전에서 순절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동안 비석만 서 있었는데 1974년 부산시가 비각(碑閣)을 세웠으며, 이 비석은 높이 172㎝, 넓이 69㎝, 두께 22㎝ 규모이다.
사. 윤공단 (尹公壇)
윤공단은 1972년 6월 26일 지방문화재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다대동 산 24번지(다대1주공 APT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공과 함께 싸우다 순사한 군민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1766년 다대첨사 이해문(李海文)이 다대객관의 동쪽에 설치한 제단(祭壇)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14일 부산진성(釜山鎭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군사를 나누어 다대포진(多大浦鎭)과 동래부(東萊府)를 공격하였다. 이때 다대첨사 윤흥신은 동생 흥제(興梯)와 군민을 이끌고 막강한 무리의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일설에는 첫날 왜적은 다대포진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윤공이 힘을 다해 물리 쳤다고 한다. 그 이튿날 적이 다시 공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였으나 적의 공격이 전날보다 더 격렬하여 마침내는 그 모두가 순사하였다는 것이다. 원래 이 단은 다대포 첨사영의 성내였던 지금의 다대초등학교에 있었던 것을 1970년 12월 5일 현재의 자리인 다대동 산24번지로 옮겼다. 비석 앞면에는「僉使 尹公 興信殉節碑」가 음각돼 있으며 뒷면에는 공의 전적이 기록되어 있다. 이 윤흥신공의 비석 양쪽에는 의사 윤흥제비(義士尹興悌碑)와 순란사민비(殉亂士民碑)가 세워져 있다. 현재 제향은 동민 중심으로 음력 4월 15일에 거행되고 있다.
아. 응봉봉수대(鷹峰烽燧臺)
봉수대(烽燧臺)는 지금의 다대동 북쪽의 아미산에 있으며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통신시설이다. 봉수는 변경지방(邊境地方)에서 일어난 긴급한 정황을 중앙 또는 인근의 군사기지에 알리는 군사상의 목적으로 설치 사용된 것이다.
대략 230리의 거리를 두고 후망(侯望)의 요지가 되는 산봉우리에 봉수대 (烽燧臺 : 烽火臺, 煙臺)를 두어 밤에는 횃불을 밝히고, 낮에는 연기를 내어 인근의 봉수대에 연락했다.
평시에는 일거(一炬, 낮 : 一煙), 적이 나타나면 2炬(二煙),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炬(三煙), 경계를 침범하면 4炬(四煙), 적과 접전하면 5炬(五煙)로 차례로 서울까지 연락하였다. 영남은 다대포가 출발점이 되어 동래 황령산을 거쳐 영천, 안동, 충주를 경유 광주(廣州)를 통하여 최종점인 서울 남산까지 이 신호는 전해졌다.
봉수대는 국가의 중대한 업무의 하나이므로 수령이 봉수군(烽燧軍) 후망(侯望)의 실태를 감독하고 이와 연대책임을 졌다. 다대포 응봉봉수대에 도별장(都別將) 1인을 두었고, 그 밑에 별장(別將) 6명을 두었고, 감고(監考)는 1명, 봉군(烽軍)은 10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봉수대를 관할하는 기관은 다대진(多大鎭) 이었다. 다대포 응봉봉수대를 비롯 황령산(荒嶺山), 계명산(鷄鳴山), 간비오산(干飛烏山), 구봉(龜烽), 오해야(吾海也), 석성(石城) 등 7개의 봉수대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 시에 그 기능을 발휘한 바도 있어서 이 유지(遺址)는 국방의식의 앙양 이란 점에서 중요시되는 문화유산이다. 다대포 봉수대는 1977년 수축(修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환경학도의 입장에서 명지대교 건설사업을 본다면
부산항과 부산신항을 연결 신속한 물류이동으로 국가 경쟁력 제고, 부산광역시 해안순환도로망과 국가기관 도로망 연계 구축, 낙동강 동,서쪽 연결 교통로 확충으로 교통난 해소 등 사회, 경제환경측면의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반면, 세계적으로 5개 보호지역으로 묶일만큼 생태적으로 가치가 큰 지역은 그리 흔치 않을 거라고 생각된다. 정부가 그 보호가치를 인정하여 보전지역으로 지정한 만큼 설사 국가적으로 아무리 중요한 국책사업이라 할지라도 개발허가를 내 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물며 명지대교 건설은 민자사업이며, 지방정부의 주장과 개발요구에 보전지역이 해제될 수 있는 거라면 이후 환경적으로 필요한 보전지역들은 하나도 지키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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