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같고 주옥같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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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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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장하였다.
제11장은 역법의 공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중국 역법 연구자들은 두 가지 기본적인 필요성의 기원하고 있다. 첫째는 농업상의 필요이자 농민의 필요이고, 둘째는 의례행사와 관리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필요이자 통치자의 필요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통치자가 역법의 정확도를 계속 높여야 한다고 느낀다는 사실은 천자의 우주적 존재성을 더 반영하는 것으로 역법은 의례행사 도구였다는 점을 시사한다. 역법의 공포는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조치로 역법의 제정은 통치자와 조정의 전유물이었다.
시간측정학의 상세한 기술은 한대에 이르러서야 유효하게 되었다. 한무제는 까지지 한해가 10월에 시작하는 진력을 사용하였으나 새로운 역법이 요구되었고 태초력이 새로운 역법으로 공포되었다. 다음의 주요 역법의 개혁은 유흠의 삼통력인데 이 체계는 왕망의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막을 내렸고, 이후 A.D.1세기 말에 사분력이 등장하였다. 수가 처음 집권하였을 때는 북주의 역법을 사용하였고, 584년 수문제는 개황력으로 불린 새 역법을 공포하였다. 당왕조의 역법은 약 290년 동안 모두 9차례 개력되었다. 초기에는 왕조역법의 제정은 선뜻 착수할 수 없는 중대한 의례행사의 실행으로 여겨졌으나 역법이 국가의 기본법이며 지배자의 정치적 이익 때문에 쉽게 바뀔 수 있다는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당고조는 새 역법편찬을 지시하였는데 그것이 ‘무인력’이다. 가장 큰 특징은 중국 역법에서 정삭법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인데 이는 태양과 달의 실제 위치가 사용되어 계산된 방법이다. 하지만 일식을 예언하지 못하는 과제가 있어 조정의 반대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태종 때에는 이순풍의 비판에 의해 정삭법이 폐지되었지만 무인력은 계속 시행되었고 그의 아들시대까지 교체되지 않았다. 무인력의 가장 큰 특징을 정삭법이라고 하였는데 정삭법이 폐지된 이후에도 무인력이 계속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가장 큰 특징이 빠진 무인력은 어떻게 시행되었을지 궁금하다.
고종의 치세 동안 역법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할 필요성이 명백해져서 새 역법이 인덕2년 1월20일 공포되었고 황제는 인덕력의 사용이 태평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라는 고결한 소망을 표시하였다. 인덕력의 편찬자는 이순풍인데 진삭법을 만들어 당후기 역법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인덕력은 무측천시대 동안의 짧은 공백 기간을 제외한 모든 당 역법 가운데 가장 오래 지속되어서 728년 까지 효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무측천시대에는 어떤 역법이 시행되었을지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하지만 역법이 개정되었다는 말만 있을 뿐 어떠한 역법이 사용되었는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새 역법의 공포가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것은 명백하며 역법의 제정은 앞선 왕조의 제도를 교체하는데 큰 기능을 하였다. 또 의례행사적이고 정치적으로 강력한 행위였고, 천자가 하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자신의 직계 조상의 역법을 저버리면서 까지도 천체의 운행을 다시 계산하려는 천자의 의지는 모든 백성을 위하여 역법을 제정하겠다는 것이었으며 이것으로서 그가 천명을 받았다는 증거가 되었다.
제12장은 전체적인 정리를 하고 있다.
핵심만 이야기하여 본다면 당초기의 통치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추가적인 정당화를 생성하려고 시도하였다. 첫째, 그들은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정통성의 관례적인 체계를 확대시키기 위해 불교와 도교의 가치를 끌어당겼다. 둘째, “천하위공”의 측면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강조함으로써, 가족에 기반하고 있는 권력의 독점적 면을 숨기려고 했다. 셋째, 왕가와 왕가의 직계조상과 떨어져서 합법적인 의례행사와 상징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넷째, 종교적인 경쟁자들을 희생시켜서 그들은 보편적인 신 호천상제의 의례적 우세를 주장하였다.
저자는 확대되는 왕가의 개념인 “천하위공”의 관념과 정당성의 가장 중요한 원천인 보편적 신의 우세함을 구현하기 위해 당초기에 의례와 상징적 황동들을 국가 차원에서 수행하였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 국가의례는 그 중심이 국가와 민족의 기원이 되거나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경축 의례들과 국가 통치자인 대통령의 취임식, 국가나 국민 전체가 애도하는 죽음과 추모행사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의례적 절차를 통한 국가의례는 국가적 정체성과 국민적 일체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한편으로 그것을 통해 국가의 정통성과 권위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과시적 성격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다.
정치적 정당성이나 정통성을 통해 획득되는 권위는 권력자의 편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그 권위는 국민의 양심에 달려있는 것이고 국민과 연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이러한 권위를 얻기 위해 일정한 형태의 의례를 필요로 한다.
대통령 취임식은 제 4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황제의 즉위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대통령 취임식은 국가수반이 권좌에 오르는 것을 나타내는 의례인 동시에 선거라는 근대적 정치 활동이 초래한 정치권력의 미결정상태 또는 공백 상태를 극복하고 새롭게 국가와 정치권력을 재구성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에 해당하는 정치적·사회적 의례이다. 의례는 현대 정치적 삶의 어디에나 있는 부분이다. 의례의 참여를 통해, 현대 국가의 시민들은 단지 상징적 형태로 보여 질 수 있는 보다 큰 정치적 힘에 동화한다. 그리고 상징의 조작을 통해 권력자는 권위를 강화한다. 그래서 정치적 현실은 대부분 상징적 수단을 통해 창조된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상서로운 전조를 통해서 당고조는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봉선의례에서 본다면 봉선의례가 처음에는 개인적인 것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비밀리에 행해졌지만 나중에는 사적인 영역보다 공적인 영역을 추구했기 때문에 개방되어졌으며 이로 인해 권력자는 정당성과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대의 대통령 취임식 또한 당나라나 그 이전의 왕조와 똑같은 방식으로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권력의 정당화를 위해서는 사회가 갖고 있는 상징체계를 통해서, 상징을 이용하고, 의례화의 과정을 통해서 개인 또는 집단적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키워드

의례,   정당성,   상징
  • 가격1,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8.07.17
  • 저작시기2007.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73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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