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문화적 업적과 서양 역사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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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로마 제국의 문화적 업적과 서양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머릿말

Ⅱ.로마 제국의 문화적 업적과 그 유산
1.로마 제국의 문화적 특징
2.로마제국의 문화적 유산
(1)법률
(2)언어
(3)건축
(4)토목공사
(5)외과 의술
(6)공중위생
(7)스토아 철학

Ⅲ. 유럽인에 있어서의 로마의 의미

Ⅳ.로마 문화가 서양 역사에 미친 영향

Ⅴ.현대 역사에 있어서 로마의 영향
1.파시즘과 로마 제국
2. 현대 유럽인들이 갖는 ‘통합’의 의미와 로마 제국
3. ‘황제’의 명칭을 통해서 본 유럽과 로마 제국

Ⅵ.맺음말

본문내용

역에 거대한 식민지를 구축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막상 유럽세계 자체는 자잘한 왕국들로 분할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뒷켠에는 과거의 영화로웠던 제국에 대한 향수와 그 복원이라는 숙제로서 로마는 항상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출처 : 시오노 나나미, <황금빛 로마>, 한길사, 2003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유럽인들의 무의식 속에도 '통합' 은 항상 언젠가는 완수해야 할 지상과제로 남아 있던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민족적인 개념의 통일이고, 이들에게는 로마 제국의 그늘 하에서 문명화된, 즉 민족이 아닌 '문화권' 개념에서의 통합이라는 점이 큰 차이다.
이런 점 때문에 비록 시대가 바뀌고 실제적인 목표도 다르지만, 이미 시행되고 있는 EU (유럽연합)의 배경에도 로마시대부터 계속되어온 통합의 심리가 어느정도는 깔려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출처 : 클라우스 헬트, <그리스 로마 철학 기행>, 백의, 2000
심지어는 EU 의 모태인 EC 의 바탕이 된 57년 3월 25일 EEC(유럽 경제 공동체)를 출범시킨 유럽 6개국의 조약이 바로 로마에서 체결되었다는 점, 제국 부흥기 당시에도 변두리의 촌으로 머물렀던 영국이 유럽통합에 다소 소극적인 것, 그리고 이슬람 국가이자 현재의 유럽 판도에서 본다면 남동쪽으로 한참 치 우쳐 있고 경제력도 약한 터키가 관세동맹 체결 등을 통해 여러가지 의미에서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사실까지도 조금 비약은 있지만 그런 맥락으로 생각해 봐도 될 것 같다.
3. ‘황제’의 명칭을 통해서 본 유럽과 로마 제국
한편, 로마의 절대성은 이후 유럽의 어느나라 왕도 맘대로 '황제' 를 칭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점에 있어서는 본토의 몇십배나 되는 식민지를 거느렸던, 전성기때의 로마제국보다도 훨씬 더 큰 영토를 자랑했던 이른바 대영 제국이나 에스파니아 왕국 등도 마찬가지다. 출처 : 시오노 나나미, <황금빛 로마>, 한길사, 2003
물론 신성로마제국과 러시아 등이 황제를 칭한 예가 있긴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경우 서기 800년 로마 교황을 이교도의 손에서 구한 공로로 교황에게서 직접 로마 황제의 칭호를 받음으로서 로마 제국의 - 일종의 - 연장으로 여겨진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 대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비록 간접적이나마 나름대로는 로마로부터 이어지는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한편 15세기 말 러시아의 이반 3세 이반 3세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름으로 러시아 일원을 통일하고 당시 유럽 동부의 지배자였던 몽골제국에 반기를 들며 멸망한 동로마제국의 정신을 계승했다. 그의 아들 이반 4세에 이르러 '차르'는 러시아 군주의 공식 명칭이 된다.
가 사용하기 시작해서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황제'의 명칭으로 쓰인 czar(짜르) 라는 단어는 애당초 라틴어 이름인 Caesar에서 온 것으로, 그가 이 말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동방정교회와 관련되어 동로마 제국의 법통과 이데올로기를 계승했기 때문이지 아무렇게나 붙인 것은 아니다.
결국 최근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황제의 칭호는 오직 로마와의 직접적인 계승관계 하에서만 사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중국 , 몽골(원)은 물론 여진(금),거란(요), 만주족(청), 심지어는 근대의 일본과 울나라에서도 한때 사용되었던 아시아의 황제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 아시아의 황제는 다스리는 영토의 크기나 산하 민족의 수 등과 관련되어 있었거나(중국 등), 때로는 그것과도 무관하게 단지 권위나 주체성을 내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된 것(일본, 한국)에 반해 유럽의 황제는 로마와의 정통성에 크게 의존한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수천년에 걸쳐 로마는 유럽인들에게 신성 불가침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Ⅵ.맺음말
유럽인들의 장점 중 합리적이고 관용적이며 개방적, 실용적이라고 불리우는 특성들은 모두 로마인의 장점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유럽의 역사 역시 다른 모든 지역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실패와 오점을 남긴 것은 사실이고, 그 과정에서 이런 장점들이 언제나 훌륭하게 구현되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언제나 로마라는 정신적인 기둥과 역사적인 자랑거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후세사람들은 불안한 시대를 벗어나려고 할 때나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할 때는 언제나 로마를 상기했다. 중세의 ‘서로마제국’ 혹은 ‘신성로마제국’이 바로 그것을 입증해 준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번의 혁명과 1,2 차 세계대전 등 파멸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결정적으로 기울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계속 문명의 힘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함은 물론이다. 또한, 이후에 전쟁과 갈등의 상처를 치유해 가면서 다시 하나로 연합해 갈 수 있는 에너지를 주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천년왕국 로마가 이룩한 ‘하나의 세계’와 찬란한 문화는 로마가 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동경과 향수를 자아내었다.
그들에 있어 로마는 언제나 ‘팍스 로마나’, 즉 평화와 번영을 상징한다. 세 번씩이나 세계를 지배한 로마 로마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진 후에도 로마는 법률과 언어로 세계를 지배했다
는 향수와 동경의 대상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로마는 서양인들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이번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참고 자료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0
진원숙, <손에 잡히는 서양사 이야기>, 신서원, 1999
진원숙, <서양사 산책>, 신서원, 1999
김상엽, <이야기 그리스 로마사>, 청아출판사, 2003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한길사, 1993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에게 묻는 20가지 질문>, 한길사, 2000
시오노 나나미, <황금빛 로마>, 한길사, 2003
아다 가부치, <로마, 절대 권력의 길을 닦다>, 예경, 2004
클라우스 헬트, <그리스 로마 철학 기행>, 백의, 2000
한스 오퍼만, <카이사르>, 한길사, 1997
홍사중, <히틀러(인간과 역사를 탐험한다 1>, 한길사, 1997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지식의 풍경,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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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2.29
  • 저작시기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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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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