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 천사옥대 기록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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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주제선정의 배경

Ⅱ. 천사옥대편의 분석
1. 신장(身長)에 관한 기록과 신장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검토
2. 인물의 무게에 관한 기록과 진평왕의 무게
3. 하늘[天]이 무언가를 준다[賜]는 의미의 해석
4. 진평왕의 옥대의 의미
(1) 옥대(玉帶)에 관한 기록
(2) 황룡사 장륙존상(丈六尊像)의 의미 검토
(3) 황룡사 9층탑의 의미 검토
(4) 소결(小結)

Ⅲ 결론―의도된 기록에 대한 해석

본문내용

의미 검토
황룡사 9층탑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세 군데 등장한다. 하나는 탑상편 ‘황룡사9층탑’ 부분이며, 다른 부분들은 ‘천사옥대’에서 신라 3보중 하나로서 9층탑을 언급하는 부분과 ‘대산월정사5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에서 오대산 월정사의 5류성중을 성적(聖跡)으로서 말하는 가운데 같이 언급된다.
삼국유사 탑상편 ‘황룡사 9층탑’부분을 보면 황룡사 9층탑의 조성은 자장법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자장법사는 선덕왕 5년(636) 입당하였다가 선덕왕 12년인 643년 귀국한다. 황룡사 9층탑이 조성되는 계기는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만난 신인(神人)에게서 나라의 어려움을 없애고 일연, 위의 책, 35쪽; 신인은 자장에게 나라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묻는다(汝國有何留難)
왕조(王祚) 조(祚)는 하늘이 내리는 복을 말한다.
가 길이 평안토록 하는 방안 일연, 위의 책, 35쪽; 신인은 9층탑을 세우면 국조가 길이 태평할 것이라 말한다(王祚永安矣)
으로써 해야 할 일로 9층탑을 세워야 함을 듣는다.
실제로 9층탑을 세운 후에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삼국유사는 이를 9층탑의 영검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한다. 일연, 위의 책, 37쪽
이와 함께 ‘천사옥대’와 ‘황룡사9층탑’에 나타난 고구려 왕과 관련된 일화는 9층탑을 비롯한 신라 3보의 역할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
① 천사옥대
후에 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고 하면서 말했다.
“신라에 세가지 보물이 있으므로 침범할 수 없다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황룡사의 장륙존상이 첫째요, 그 절의 9층탑이 둘째요, 하늘이 진평왕에게 준 옥대가 그 셋째입니다.”
이에 왕은 신라를 칠 계획을 그만 두었다. 일연, 이재호 譯, 삼국유사1, 서울: 솔, 159쪽
② 황룡사9층탑
후에 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 하다가 말했다.
“신라에 삼보가 있어서 침범할 수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이름이냐?”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탑, 그리고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은 옥대입니다.”
그래서 침범할 계획을 중지하였다. 일연, 이재호 譯, 삼국유사2, 서울: 솔, 37쪽
또한 삼국유사는 9층탑의 이런 영검과 의미에 대해서 “주나라에 구정(九鼎)이 있기 때문에 초나라 사람들이 감히 주나라를 엿보지 못했다 하니, 이러한 경우일 것이다.”라고 하여 황룡사 9층탑의 의미를 평가하고 있다.
(4) 소결(小結)―진평왕의 옥대를 비롯한 신라 3보의 의미 검토
진평왕의 옥대를 비롯한 신라 3보의 의미는 황룡사 9층탑의 기록과 신라 3보에 관한 고구려왕의 반응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고 판단된다. 대내적으로 왕의 권위와 신비스러움, 그리고 대외적으로 국가의 권위와 신비스러움을 드러냄으로써 안으로는 왕권을 튼튼히 하고, 밖으로는 외국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진평왕의 옥대나 황룡사 장륙존상에는 황룡사 9층탑에 나타난 바와 같은 직접적인 영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이들 모두 신비스러움을 강조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들 신라 3보가 996년의 신라 역사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정치적인의도를 읽을 수 있게 한다. 가장 이른 황룡사 장륙존상의 조성이 완성된 것은 진흥왕 35년인 574년이며, 진평왕이 옥대를 하늘로부터 얻은 것은 진평왕 즉위 원년인 579년이다. 그리고 황룡사에 9층탑이 완성된 것은 자장법사가 귀국한 선덕왕 14년인 645년이다. 이는 장륙존상과 천사옥대는 5년의 시간차이를 두고 신라에 생겼으며, 9층탑 또한 조성된 것은 그로부터 약 60여년 이내라는 말이다. 이런 사실은 삼국통일기 급박한 대외정세에서 신라왕이 그 왕권을 강화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왕권 강화의 범주에는 일반적 의미의 왕권의 강화뿐만 아니라 불교를 이용한 국민들의 사상적인 통일도 포함될 것이라고 본다. 국력의 집중이 절실한 삼국통일기에 이런 신이한 사건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신라왕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불교를 국력을 집중시키기 위한 사상적 통일의 도구로 활용하는 한편, (불교와 왕실의 밀접한 관계를 볼 때) 불교와 왕권을 결합시킴으로써 신라왕이 국민의 사상과 신앙의 중심에 서려는 의도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Ⅲ 결론―의도된 기록에 대한 해석
지금까지 진평왕 때 나타나는 하늘이 내려준 옥대(天賜玉帶)의 기록을 해석해 보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글은 글쓴이의 의도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글을 읽는 사람은 글의 표면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글에 내재된 의도와 작성 배경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글을 재해석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본문에서는 진평왕의 천사옥대 부분만을 다루었지만 이런 왕과 관련된 신이한 기록이 국가성립의 초기(재4탈해왕, 가락국기 등), 신라의 통일기를 전후한 강력한 왕권이 요구되는 시기(천사옥대, 선덕왕지기삼사, 만파식적 등), 신라 중대 전제왕권이 무너지는 시기(원성대왕, 48경문대왕 등)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이런 글들은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생산된다고 파악할 수 있다.
오늘날도 하루치 신문을 읽더라도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이 부분적으로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삼국유사는 삼국시대 거의 천년의 역사를 다루는 사서로서 특히 신라의 정신과 신앙, 그리고 정치와 왕권에 관한 부분에 있어 서로 떨어지지 않고 사회 각 부분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부분은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미진하지만 이런 기록의 해석 과정을 통해 오늘날 하루치 신문을 보는데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목차
Ⅰ. 주제선정의 배경
Ⅱ. 천사옥대편의 분석
1. 신장(身長)에 관한 기록과 신장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검토
2. 인물의 무게에 관한 기록과 진평왕의 무게
3. 하늘[天]이 무언가를 준다[賜]는 의미의 해석
4. 진평왕의 옥대의 의미
(1) 옥대(玉帶)에 관한 기록
(2) 황룡사 장륙존상(丈六尊像)의 의미 검토
(3) 황룡사 9층탑의 의미 검토
(4) 소결(小結)
Ⅲ 결론―의도된 기록에 대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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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1.02
  • 저작시기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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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12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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