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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신자유주의 모델][신자유주의 세계화][신자유주의 전망]신자유주의의 의미, 신자유주의의 뿌리, 신자유주의의 주요 주장,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신자유주의와 제7차교육과정,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신자유주의의 의미

Ⅲ. 신자유주의의 뿌리
1. 자본의 포화 상태
2. 선진 자본주의 복지국가체제의 실패
3. 자본축적을 위한 국가의 개입정책

Ⅳ. 신자유주의 주요 주장
1. 국내경제적 측면
2. 국제경제적 측면

Ⅴ.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Ⅵ. 신자유주의와 제7차교육과정

Ⅶ.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망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폭발, 항상적이고 만성적인 과잉생산의 위기 아닌가? 1970년대 이래의 자본주의적 생산에는 바로 그러한 모순·위기가 폭발하고 있고, 지금 갈수록 그 모순과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러한 모순·위기가 심화될수록 그 광기를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특히 근래 수년 동안 갈수록 속도를 더하면서 전개되어 온 과학기술혁명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항상적·만성적 과잉생산과 그에 따른 경쟁의 격화라는 신자유주의적 조건하에서 독점자본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전개되어 온 것이고, 다시 그 결과가 그러한 과잉생산·전반적 위기를 다시 격화시키는 식으로 가속도적으로 전개되어 온 것이고, 또 전개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확대라는 이른바 노동의 유연화의 기초에도 바로 이 과학기술혁명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고도로 높이고 있는 노동생산력 때문에 자본이 잉여노동력을 사회적으로 폐기해가고 있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정리해고요 노동의 유연화인 것이다. 그러나 이 과학기술혁명과 노동의 유연화를 통해서 자본은 결코 더 이상 더 많은 노동력의 동원이 곧 더 큰 가치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생산방식을 발견한 것도, 이제 고용을 수반하지 않는 성장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이제 노동자들이 고전적인 교과서적인 인식에 기초한 그저 그 충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시대착오적인 투쟁을 그만두고, 산별교섭체제에 기반한 사회적인 노사관계로 전환을 전제로 사민주의 혹은 수정 자본주의의 계급타협의 틀, 케인즈주의적 노선을 추구해야 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 과학기술혁명은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반적 위기, 그 항상적·만성적 과잉생산을 격화시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종언을 재촉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현재의 상황이 이러하니 사실 신자유주의가 극성을 부릴수록 노동자·민중의 앞에는 절망이 아니라 역사적·정치적 전망이 가로놓여 있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물론 대전쟁으로의 신자유주의의 질주를 대중의 반전·반제국주의 투쟁으로 저지한다는 전제하에서이지만 말이다.
Ⅷ. 결론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혼돈에 대한 혼돈의 이론이고, 사회적 어리석음에 대한 어리석은 찬양이며, 파국에 대한 파국적인 정치관리이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정의에 관하여 어느 대학원생이 작성하여 온 보고서의 서두를 장식한 글이다. 번역 인용으로 채워진 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하나의 전략이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신자유주의도] 여러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다. 레이거노믹스, 대처리즘, 공급중심경제학, 통화주의, 신고전파 경제학, 그리고 구조조정이 그것이다. 위의 보고서를 재인용한 것은 객관적 정의나 분석보다 직관적, 정서적 판단을 내리고자 하는 충동이 우리나라의 사회과학의 학문적 토양에 얼마나 깊이 감염되고 있는가를 보이기 위해서이다. 훨씬 우회적이긴 하지만, 객관적 정의 또는 설명만을 제공하고, 독자로 하여금 선악을 판단하게 하는 지성의 겸허는 다음에 인용하는 대학교수의 글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밀턴 프리드만과 시카고학파의 신자유주의와 관련하여 궁극적으로 다루어야 할 몇 가지 문제의식을 추출할 수 있다. 첫째, 신자유주의란 1960-1970년대의 신경제학이라는 이름 아래 케인즈주의의 정책적 적용에 이어, 1980년대 이후 자유주의의 정책적 적용 경향을 지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60년대에 케인즈가 켐브릿지에 없었듯이, 80년대에 하이에크도 프리드만도 시카고에 없었다. 신경제학자를 캠브릿지에서 찾을 수 없었듯이, 시카고에서 신자유주의자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오직, 1940-50년대에 자유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확충하기 위하여 적용되어온, 이론과 실증의 체계적 통합에의 지향, 또 그러한 방법론적 전제 위에서의 혁신적 아이디어의 창출과 검증을 위한 자유로운(격렬한) 토론이라는 학문적 전통이 시카고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학문적 배경과 경제철학에서 프리드만은 자유주의론에 이르게 되는가? 또, 게임이론, 메카니즘이론 등 현대의 분석방법으로 그러한 프리드만의 결론을 객관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둘째, 신자유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의 본거지인 시카고학파 또는 이를 주도하는 밀턴 프리드만에 대하여 상당한 반감이 폭넓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체계적인 설문조사를 시행하지는 못하였지만, 아마도 우리나라 지성인들 가운데 신자유주의자는 없다. 물론, 10명의 사회과학자들에게 문의하면, 모두 다른 9명은 신자유주의자들지만, 자신은 아니라고 대답할는지 몰라도. 이러한 반감의 원천은 무엇인가? 이에는 아마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내어 온 시카고학파에 대한 질시나, 미국주도 자유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감 이상의 논리가 있지 않을까? 나아가, 정치적 지도논리로서 주의·사상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생성되고, 전파, 수용 또는 왜곡되는가? 셋째, 우리나라의 지성인들에게 지성적 개입주의의 경향이 두드러지다는 것이다. 즉, 객관적 정보만을 제공하고 최종적인 판단을 독자에게 맡기기 보다는 선악, 정사(正邪), 또는 좇느냐, 피하느냐(run-or-chase)류의 판단을 강요하고자 한다. 이러한 지성적 개입주의는 정책적 개입주의와 밀접히 연관될 수 있으며, 이는 다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이라는 두 번째 경향과 관련이 있다. 독자의 판단을 신뢰하지 못하는 학자들이 일반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을 신뢰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김성구심용보(2002), 신자유주의와 공공부문 구조조정, 문화과학사
▷ 리처드 세넷(2002),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문예출판사
▷ 박광주(1998), 신자유주의와 아시아의 경제위기 그리고 한국, 부산대학교출판부
▷ 양동안(2000), 자유공론 11월호
▷ 윤진호(1999),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과 노동조합의 대응: 영국, 미국, 독일, 한국사회경제학회 노동분과 발표논문
▷ 이미경(1999), 신자유주의적 반격하에서 핵가족과 가족의 위기, 공감
▷ 킴 무디(1999),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 문화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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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2.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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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19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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