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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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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1. 로마의 개관
2. 사회제도
3. 로마시대의 구분

Ⅱ. 로마의 도시와 공간
1. 도로와 도시계획
2. 로마의 공간론

Ⅲ. 로마의 건축
1. 건축의 형성조건
1) 로마건축의 형성조건
2) 비잔틴건축의 형성조건
3) 로마네스크건축의 형성조건
4) 고딕건축의 형성조건
2. 돔구조
1) 로마건축
2) 비잔틴 건축
3) 로마네스크 건축
3. 볼트구조
1) 로마건축
2) 로마네스크건축

Ⅳ. 로마의 서정시

Ⅴ. 로마의 게임

Ⅵ. 로마신화와 그리스신화

Ⅶ. 로마의 황제

Ⅷ. 로마의 멸망
1. 카라칼라 황제가 속주민과 로마시민사이의 차별을 없앤 것
2. 정복전쟁의 부재
3. 보병 위주의 전쟁에서 기병위주의 전쟁으로의 변화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 타르퀴니우스 시대에 공화정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들은 왕정의 그림자만 비쳐도 과민반응을 보일 정도로 왕정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다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후의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잡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로마는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나아가게 된다. 원래 황제라는 말은 중국 진시황이 정한 호칭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를 유럽에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번역상의 차이일 뿐인 것이다. 로마 제국에서 황제에게 주어지는 호칭으로는 임페라토르(전군 총사령관), 프린켑스(제일인자), 카이사르(원래는 가문 이름) 아우구스투스(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주어진 존칭 : 존엄한 자)등이었다. 이 중에서 임페라토르는 오늘날 황제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 엠퍼러의 어원이고 카이사르는 역시 황제를 뜻하는 독일어 카이져의 어원이다. 이를 동양식으로 번역할 때 가장 어울리는 말이 \'황제\'였기 때문에 \'황제\'라고 쓰는 것이다. 제정 로마 시대 때는 보통 황제를 카이사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임페라토르는 지나치게 군사적인 색채를 띄고 있었고 프린켑스는 단지 제일인자라는 말이었기 때문에 의미가 모호했고 아우구스투스는 지나치게 장중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양자이다) 명인 카이사르가 황제의 관용어처럼 굳어지게 된 것이다. 성경을 보면 \'신의 것은 신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가이사는 바로 카이사르를 말하는 것으로 이때의 카이사르는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를 말하는 것이다. 네로 황제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직계는 완전히 끊어지게 되지만 그 후의 황제들은 모두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개인이름에 넣어서 썼다.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황제들은 모두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을 자신의 이름에 넣어 권위를 더했던 것이다. 이처럼 로마 시대 때 이미 황제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임페라토르나 카이사르라는 말이 절대 권력자를 의미하는 말로 변해갔고 이것이 동양의 절대 권력자를 의미하는 황제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황제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Ⅷ. 로마의 멸망
1. 카라칼라 황제가 속주민과 로마시민사이의 차별을 없앤 것
속주민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제정상의 이유였다고는 하지만 카라칼라 황제가 속주민과 로마시민사이의 차별을 없앤 것은 로마 사회에 치명상을 입혔다.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속으로 점점 썩어들어가는 상처를 입힌 셈이다. 우선 속주민에 대한 차별을 없애면서 결국 국방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속주세가 사라져 제정적인 공백이 생겼고 따라서 이러한 공백을 없애기 위해 로마 시민에게 상속세와 노예해방세와 같은 직접세의 세율을 올렸으나 로마 시민의 반발로 세율은 결국 예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국방비를 조달하기 위해 일이 터질때마다 임시세성격의 세금을 거두어 드림으로써 아주 투명하였던 조세제도가 혼탁해지기 시작한거다. 또 하나 속주민의 차별을 없앰으로써 로마군단의 절반을 차지하던 보조병이 모두 정규 군단병이 된 것이다. 본래 군단병에 비해 보조병은 급여도 작을 뿐 아니라 퇴직금이 없었으므로(퇴직금이 바로 로마 시민권이었다) 실질적인 유지비용이 정규 군단병의 비해 상당히 작았을텐데 이렇게 속주민과의 차별을 없애 보조병이 모두 군단병이 되므로써 국방비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우선 이러한 것들 때문에 국가 제정에 빨간불이 켜지게 된다.
2. 정복전쟁의 부재
로마는 포에니전쟁이후 정복전쟁을 통하여 지중해를 내해로 삼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즉 영토 확장 전쟁을 통한 물자의 소비 노예의 유입 전리품의 획득 등이 바로 로마 발전에서 큰 동력이 된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복 전쟁의 결과가 바로 오현제 시대의 팍스로마나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현제 시대의 팍스로마나는 로마의 발전동력을 상실시킨 시대다. 과감한 정복전쟁을 벌였던 트라야누스이후 제국의 방어선을 확고화 한 하드리아누스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현제라 불린 안토니누스의 시대의 평화는 결국 정복자로서의 로마의 모습을 사라지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이 결국 철인황제 아우렐리우스시대의 외적의 침입기를 가져온 셈이다.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우선 정복전쟁의 중단은 노예의 추가 유입의 감소를 의미하고 이러한 노예의 수의 감소는 결국 제국 내 생산력의 정체를 의미한다. 또한 새로운 영토와 전리품의 유입중지는 제국내 금, 은과 같은 귀금속의 증가의 둔화를 가져오고 결국 이러한 것은 경제활동의 둔화를 가져온다. 결국은 제국전체의 경제발전이 둔화된 것이다.
3. 보병 위주의 전쟁에서 기병위주의 전쟁으로의 변화
알다시피 로마는 중장보병을 군사적 기반으로 성장한 국가다. 그 주력 역시 중장보병이구요 기병은 보조적인 임무만을 수행했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3세기가 지나면 기병이 주력인 게르만족이 침입을 하게 된다. 보병이 공격을 하게 되고 기병이 수비를 한다면 보병과 기병사이의 기동성의 차이는 크게 부각되지 않지만 보병이 수비를 하는 입장이라면 그 둘의 차이는 돌이킬 수 없어지는 것이다. 스피드말이다. 게다가 게르만족들은 약탈이 주목적이었던 만큼 치고 빠지기에 능해 넓은 국경선에만 군대를 배치한 로마로서는 일이 터진 곳에 군대를 파견하면 이미 적은 도망가는 이런 국방력의 낭비와 사회 혼란을 가져온 셈이다. 특히 로마와 같이 영토에 비해 국경선이 길고 방어병력을 국경선에 배치하여서 방어를 하는 국가의 경우 기병에 의해 유린되기가 쉬운 편이다. 결국 이러한 침입이 로마의 멸망을 앞당긴거다. 실례로 상대적으로 국경선이 짧았던 동로마 제국은 외침을 견뎌낸데 비해 국경선이 길었던 서로마제국은 멸망당하고 만 것이다.
참고문헌
성진규(2000), 로마 공화정 후기의 민회 활동 연구, 계명대학교 대학원
지동식(1982), 로마제국은 왜 멸망했는가?, 대학 문화사
정기문, 로마제정의 조세제도 정비와 그 한계
프리츠 하이켈하임, 김덕수 역(1999), 로마사, 현대 지성사
황태호, 로마제정기의 검투 경기에 관한 연구
Montanelli·Indro(1998), 로마 제국사,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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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2.2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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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2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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