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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벼농사][벼농사 기원][벼농사 시대별 역사][벼 생육환경][벼농사 기술][이앙법][견종법][농서]벼농사의 기원, 벼농사의 시대별 역사, 벼의 생육환경, 벼농사의 기술(이앙법과 견종법), 농서의 편찬과 보급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벼농사의 기원

Ⅱ. 벼농사의 시대별 역사
1. 청동기 및 삼국시대의 농경문화
2. 고려말 이후의 벼농사법과 농경문화
1) 고려말 이후 벼농사법과 그 성격
2) 고려말과 조선전기의 불화(佛畵)에 나타난 농경문화
3. 조선후기 벼농사의 발달

Ⅲ. 벼의 생육환경
1. 토양환경
1) 논의 종류
2) 논 토양의 특성
2. 기상환경(기온)
1) 생육시기와 온도
2) 적산온도
3) 온도와 벼 생육
4) 일조(일사량)
5) 물(강우)
6) 대기

Ⅳ. 벼농사의 기술(이앙법과 견종법)
1. 이앙법
2. 견종법

Ⅴ. 농서의 편찬과 보급
1. 농사직설
2. 산가요록
1) ꡔ산가요록ꡕ의 채소기술
2) 15세기의 원예기술
3. 양화소록
4. 금양잡록
5. 농가월령

참고문헌

본문내용

반면 농가월령에서는 경지에 고랑(骨巷)을 내고 맥(麥)은 물론이고, 조(粟)., 두(豆), 들깨(水荏), 수수(糖), 호마(胡麻)까지도 고랑에다 파종하였다.
그러면 농가월령에서는 왜 이렇게 고랑에다 파종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다름아니라 농가월령에서 맥전의 고랑에 파종하는 파종법은 독자적인 파종법이 아니라 이미 겨울보리(凍)나 가을보리(秋麥)가 심어져 있는 빈 자리에 다른 작물의 종자를 파종하는 간종법이었다. 따라서 겨울보리나 가을보리의 수확이 끝나면 그 자리를 갈아 갖농으로 심어져 자라고 있는 콩과 조의 뿌리에 흙을 돋우어 줌으로써(培土) 그 싹이 두둑 위에서 자라도록 하는 파종법이었다. 맥전에 파종하는 이러한 간종법(間種法)을 당시에는 ‘골고리’라고 지칭하였다.
「농가월령」에서 발견되는 골고리 농법은 발달된 1년2작식의 작부체계로서 당시의 농업생산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을 것이다. 이른바 7년에 걸친 전쟁이 조선 사회에 야기한 경제적 위기는 엄청났다. 식량 확보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당시에 있어 지방관으로서, 그리고 의병장으로서 직접 전쟁에 참여한 고상안은 황폐한 논밭을 회복시키기 위해 보다 생산성이 우수한 신농법으로 경제적 위기를 타개해 나갔던 것이다. 그의 골고리 농법은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농가월령을 통하여 농법의 발달추세를 뚜렷하게 감지할 수 있다. 이른바 농사직설에서는 기장과 조나 콩과 팥의 1년1작의 형태로 재배되었다. 그러나 농가월령에서는 경지의 보다 집약적인 이용을 위해 주작물인 麥이 자라나는 도중에 이들 작목을 고랑에 간종하였다가 주작물을 수확한 후에 흙을 돋우어 두둑 위에서 자라도록 하는 농법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농가월령」은 당시의 농학과 농법을 대표하는 여러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작물의 재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적시적지(適時適地)의 원칙을 충실히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사를 짓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상조건, 품종의 특성 등을 보아 적절한 파종시기를 선택하는 것과, 그 작물에 맞는 좋은 땅(土性)을 고르는 것의 두가지이다. 이러한 현재 농업기술을 고상안은 간파하고 월령식으로 농서를 기술함으로써 농가월령의 핵심 사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상안은 시비기술을 매우 강조하는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같이 작물생산의 요체는 비옥한 토질 위에서 보다 많은 수확량을 올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전기 이래로 우리 나라는 척박한 토지조건 속에서도 꾸준히 시비기술을 개발해 왔다. 척박한 토양조건에서 보다 많은 비료를 주지 않으면 수확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농가월령에는 많은 새로운 비료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편 태촌 고상안은 농업경영에 소와 말(牛馬)사육이 매우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소나 말을 사육하는 것은 마굿간(牛馬厠間)을 퇴구비의 생산과 바로 이어지게 하는 일이었다. 뿐만아니라 농업경영을 하려면 반드시 소나 말을 소유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들이 없이는 비료원을 얻기도 힘들뿐 아니라 농사를 지을수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농가월령을 보면 상업적 농업의 모습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가을 추수가 끝나면 영리에 밝은 사람과 튼튼한 말을 골라 고기나 소금(魚鹽)을 사다가 장사하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런데 고기와 소금을 구입하려면 그들이 생산한 농작물을 판매하지 않으면 안된다. 태촌은 이를 위해 담배(南草), 목화, 홍화, 쪽(藍), 果木 재배와 養蠶을 장려하였다. 이들 상업적 작물은 곧 바로 판매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상주, 문경 지방은 낙농강 상류와 내륙교통의 요충지로서 자연스럽게 교역이 성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한다면 고상안이 이 지역을 근간으로 농가월령을 통하여 상업적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한 점은 충분히 현실적인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농가월령은 태촌의 고향이자 그가 말년에 살았던 상주, 문경지방의 농업관행을 토대로 편찬한 것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지방관으로서 여러 지방을 역임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지역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 따라서 농업경영에 관해 기록되어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어느 정도 고상안의 직접적인 농사경험이 기초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태촌 고상안이 농지를 얼마나 소유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4형제가 이웃에 함께 살았던 대가족이었으므로 많은 농지를 소유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태촌은 이 책을 저술한 의도에 대하여 ‘양란 이후 농서가 분실되어 농민들이 농사에 참고할 책이 없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자신이 연구한 새로운 농업기술을 집안에 있는 가동들에게 실험하게 한 것은 그가 직접 농업경영에 참여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이른바 자신 소유 토지의 많은 부분을 노비노동을 이용해 직접 경영하면서 바쁜 농사철에는 인근의 농민들을 대상으로 고용노동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농가월령의 농업생산 및 경영의 주체는 많은 소와 말을 소유하면서 스스로 농사도 짓는 재지지주층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살펴본 바에 따르면 고상안은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농학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한 농학자였다고 생각된다. 태촌의 농서를 검토하면 농학적 기반이 매우 탄탄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전에 나온 중국의 여러 고농서를 검토하였지만 저술 할때에는 이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농서 저술방식은 당시 지역농업에서 관행되고 있는 농법과 그가 직접 경험으로 확인한 바있는 기술들을 채록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선택된 기술은 그가 지방관으로 있을 때 직접 확인한 경상도 지역의 농업기술과 그의 생활의 근거지였던 상주와 문경 지방 및 그 주변지역이 그 대상이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용섭, 조선후기농학사연구, 일조각, 1988
민성기, 조선농업사연구, 일조각, 1988
벼 재배연구 30연사, 농촌진흥청 p39-301
안희남, 쌀, 수문서관, 1995
이호철, 농업경제사연구, 증보개정판, 경북대출판부, 1989
이춘녕, 쌀과 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최해춘, 쌀을 알자, 신구문화사

키워드

벼농사,   이앙법,   견종법,   ,   농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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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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