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나말여초의 시대적 배경
Ⅱ. 나말여초의 6두품세력성장과 지방호족세력등장
1. 6두품세력의 성장
2. 지방호족세력의 대두
1) 호족세력의 대두배경
2) 호족세력의 유형과 성장
Ⅲ. 나말여초 후삼국의 성립과 통일
1. 후삼국의 성립
2. 후삼국의 건립과 발전
3. 후삼국의 통일-고려
Ⅳ. 나말여초의 사상
1. 신라말의 사상
1) 유학(도교)
2) 화엄종
3) 선종
4) 풍수지리설
5) 미륵신앙
2. 고려초의 사상
1) 고려전기 불교사상
2) 유학
3. 전통신앙
Ⅴ. 나말여초의 시대적 의미
참고문헌
Ⅱ. 나말여초의 6두품세력성장과 지방호족세력등장
1. 6두품세력의 성장
2. 지방호족세력의 대두
1) 호족세력의 대두배경
2) 호족세력의 유형과 성장
Ⅲ. 나말여초 후삼국의 성립과 통일
1. 후삼국의 성립
2. 후삼국의 건립과 발전
3. 후삼국의 통일-고려
Ⅳ. 나말여초의 사상
1. 신라말의 사상
1) 유학(도교)
2) 화엄종
3) 선종
4) 풍수지리설
5) 미륵신앙
2. 고려초의 사상
1) 고려전기 불교사상
2) 유학
3. 전통신앙
Ⅴ. 나말여초의 시대적 의미
참고문헌
본문내용
는 화엄종단이 왕실의 지원을 받아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문종의 4子 의천이 출가하고, 이후 숙종의 子 등엄, 인종의 子 충의등이 계속하여 화엄종단에 출가하여 왕실의 지원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의천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의천은 균여계통의 화엄학을 배척하고 송대 화엄을 수용하였다. 그는 경전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여러 경론들이 각각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므로 단계적인 兼學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의천은 법상종의 유식학을 배웠으며, 1097년 국청사가 완공되자 초대 주지로 주석하면서 천태학을 강조하였다. 천태학의 會三歸一사상은 이후 불교계를 통합하는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2) 유학
골품제적 사회구조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고려왕조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유학의 성격과 사회적 기능은 새롭게 인식되고 있었다. 태조 왕건은 궁예의 폭정을 천지가 불용하고 신인이 공노할 일이므로 폭군을 폐하고 명군을 세우는 것이 천하의 대의인 바 탕무의 일을 행할 것을 건의한 신하들의 방벌론적 혁명론을 명분적 토대로 하여 즉위하였다. 여기서 보듯이 선왕적 왕도론에 근거한 복고적 정치사상인 유학이 오히려 왕조교체의 정당화에 적합한 명분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태조 자신도 취민유도를 내세우고 백성구휼, 구현의 중요성과 신하의 예절을 강조하였던 것에서 새로운 체제의 정비를 위해 유교적 정치이념을 중시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태조 왕건이 지향한 유교적 정치이념 가운데 특히 두드러진 특징은 중앙관료의 선발과 운용에 관한 것이었다. 태조는 품성단방, 청렴봉공 등을 중아관료의 자질로서 규정하는 한편 신하로서의 예절을 강조하고 선현이 급선무임을 강조하였던 바, 태조 주위에는 최언위, 최응 등을 미롯한 반신라적 유학자들이 대거 포진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이 시기 유학은 군신간의 명분을 제공하고 관료들간의 위계질서를 유지해 줄 뿐만 아니라 나말여초의 혼란된 사회상을 수습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이념을 제공하는 학문으로서 긍정적인 기능이 인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분상 유교적 정치이념이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현실적인 예제로 실행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인심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불교였던 것이다. 전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체제로의 정비를 위해 유교적 정치이념이 표방되어 일정한 정도까지 발전되었지만 유교적 예제가 실행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전기 유학은 불교의 영향이 컸던 만큼 보편적인 사회사상으로는 기능할 수 없었으나 정치제도의 발전에는 크게 기여하였고, 특히 광종9년(959)부터 과거제가 실시됨으로써 文風이 크게 진작될 수 있었다. 초창기 과거제도는 유학에 대한 학문적 소양을 지닌 새로운 관료를 선발하여 중앙관료로 임명함으로써 신구세력의 교체를 통해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개혁정치의 산물이었다. 광종대의 개혁정치를 토대로 하여 성종대에는 유교적 정치제도가 획기적으로 발전되었다. 국자감의 설치와 나아가 학교제→과거제→전주제로 연결하여 운영하는 체계를 정착시켜 갔다. 또한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책을 토대로 불교적인 행사를 억제하며 유교적인 예제를 보급하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성종대의 화풍을 지향하던 일련의 유교적 개혁정책은 契丹의 침입을 계기로 한계점이 노출되었다. 외세의 침략에 즈음하여 선왕대의 연등팔관등을 다시 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었던 것이다.
3. 전통신앙
고려시대에는 여전히 불교가 융성하였고 유교가 정치사상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교와 함께 한국 고유의 전통신앙이라 할 수 있는 지리도참, 천신산신수신숭배가 계속되었고 무속신앙성황신앙 등도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시대는 가히 다원종교다원신앙의 시대였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은 고려 태조의 훈요10조에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 여러 부처의 힘에 의한 것이라 하면서 불교행사인 연등회를 잘거행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사원을 도선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개창하였다 하였고 서경은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볼 때 대업만대의 땅이라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연등회와 함께 팔관회도 거행할 것을 부탁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팔관회가 천령과 오악명산대천용신을 섬기기 때문이라 하고 있다. 충청도 여산에서 신검의 군대를 격파한 뒤에도 그것이 부처님의 가호와 더불어 산신령의 음조에 힘입은 것이라 하고 있다.
Ⅴ. 나말여초의 시대적 의미
신라말고려초의 사회변동은 신라골품제사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창출해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변동을 주도한 사회세력은 물론 호족세력이었다. 이 사회변동은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의해서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성립된 고려사회는 신라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로서, 신라사회보다 여러 측면에서 한 단계 더 발전된 사회였다. 고려사회는 신라사회에 비하여 훨씬 개방적인 사회였다. 고려사회는 중앙인과 지방인의 차별이 없는 사회였다. 중앙인의 배타적인 특권이 존재하지 않았고, 지방인도 중앙으로 진출하여 중앙인과 동등한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전국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출신 지역에 따라 차별대우를 받지 않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고려사회는 지방세력인 호족세력에 의해서 성립되었고, 그런 만큼 지방세력의 사회적 진출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사회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호족은 신라말고려초의 사회변동을 주도한 지방세력이었다. 호족은 경주 중심진골 중심의 신라골품제사회를 해체하고 각지의 지방민과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지배체제에 참여할 수 있는 보다 개방적인 사회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 김갑동(1990), 나말여초의 호족과 사회변동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윤경진, 나말여초 성주의 존재양태와 고려의 대성주정책
* 임형택(1981), 나말여초의 ‘전기’문학, 한국한문학연구, 제5집, 한국한문학연구회
* 정청주(1996), 신라말 고려초 호족연구, 일조각
* 추만호(1992), 나말여초 선종사상사 연구, 도서출판 이론과 실천
* 한국사강론, 국사교재편찬위원회 형설
* 한국고대사연구회(1994), 신라말 고려초의 정치·사회변동, 도서출판 신서원
이 시기에는 의천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의천은 균여계통의 화엄학을 배척하고 송대 화엄을 수용하였다. 그는 경전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여러 경론들이 각각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므로 단계적인 兼學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의천은 법상종의 유식학을 배웠으며, 1097년 국청사가 완공되자 초대 주지로 주석하면서 천태학을 강조하였다. 천태학의 會三歸一사상은 이후 불교계를 통합하는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2) 유학
골품제적 사회구조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고려왕조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유학의 성격과 사회적 기능은 새롭게 인식되고 있었다. 태조 왕건은 궁예의 폭정을 천지가 불용하고 신인이 공노할 일이므로 폭군을 폐하고 명군을 세우는 것이 천하의 대의인 바 탕무의 일을 행할 것을 건의한 신하들의 방벌론적 혁명론을 명분적 토대로 하여 즉위하였다. 여기서 보듯이 선왕적 왕도론에 근거한 복고적 정치사상인 유학이 오히려 왕조교체의 정당화에 적합한 명분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태조 자신도 취민유도를 내세우고 백성구휼, 구현의 중요성과 신하의 예절을 강조하였던 것에서 새로운 체제의 정비를 위해 유교적 정치이념을 중시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태조 왕건이 지향한 유교적 정치이념 가운데 특히 두드러진 특징은 중앙관료의 선발과 운용에 관한 것이었다. 태조는 품성단방, 청렴봉공 등을 중아관료의 자질로서 규정하는 한편 신하로서의 예절을 강조하고 선현이 급선무임을 강조하였던 바, 태조 주위에는 최언위, 최응 등을 미롯한 반신라적 유학자들이 대거 포진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이 시기 유학은 군신간의 명분을 제공하고 관료들간의 위계질서를 유지해 줄 뿐만 아니라 나말여초의 혼란된 사회상을 수습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이념을 제공하는 학문으로서 긍정적인 기능이 인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분상 유교적 정치이념이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현실적인 예제로 실행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인심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불교였던 것이다. 전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체제로의 정비를 위해 유교적 정치이념이 표방되어 일정한 정도까지 발전되었지만 유교적 예제가 실행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전기 유학은 불교의 영향이 컸던 만큼 보편적인 사회사상으로는 기능할 수 없었으나 정치제도의 발전에는 크게 기여하였고, 특히 광종9년(959)부터 과거제가 실시됨으로써 文風이 크게 진작될 수 있었다. 초창기 과거제도는 유학에 대한 학문적 소양을 지닌 새로운 관료를 선발하여 중앙관료로 임명함으로써 신구세력의 교체를 통해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개혁정치의 산물이었다. 광종대의 개혁정치를 토대로 하여 성종대에는 유교적 정치제도가 획기적으로 발전되었다. 국자감의 설치와 나아가 학교제→과거제→전주제로 연결하여 운영하는 체계를 정착시켜 갔다. 또한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책을 토대로 불교적인 행사를 억제하며 유교적인 예제를 보급하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성종대의 화풍을 지향하던 일련의 유교적 개혁정책은 契丹의 침입을 계기로 한계점이 노출되었다. 외세의 침략에 즈음하여 선왕대의 연등팔관등을 다시 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었던 것이다.
3. 전통신앙
고려시대에는 여전히 불교가 융성하였고 유교가 정치사상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교와 함께 한국 고유의 전통신앙이라 할 수 있는 지리도참, 천신산신수신숭배가 계속되었고 무속신앙성황신앙 등도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시대는 가히 다원종교다원신앙의 시대였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은 고려 태조의 훈요10조에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 여러 부처의 힘에 의한 것이라 하면서 불교행사인 연등회를 잘거행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사원을 도선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개창하였다 하였고 서경은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볼 때 대업만대의 땅이라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연등회와 함께 팔관회도 거행할 것을 부탁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팔관회가 천령과 오악명산대천용신을 섬기기 때문이라 하고 있다. 충청도 여산에서 신검의 군대를 격파한 뒤에도 그것이 부처님의 가호와 더불어 산신령의 음조에 힘입은 것이라 하고 있다.
Ⅴ. 나말여초의 시대적 의미
신라말고려초의 사회변동은 신라골품제사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창출해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변동을 주도한 사회세력은 물론 호족세력이었다. 이 사회변동은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의해서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성립된 고려사회는 신라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로서, 신라사회보다 여러 측면에서 한 단계 더 발전된 사회였다. 고려사회는 신라사회에 비하여 훨씬 개방적인 사회였다. 고려사회는 중앙인과 지방인의 차별이 없는 사회였다. 중앙인의 배타적인 특권이 존재하지 않았고, 지방인도 중앙으로 진출하여 중앙인과 동등한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전국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출신 지역에 따라 차별대우를 받지 않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고려사회는 지방세력인 호족세력에 의해서 성립되었고, 그런 만큼 지방세력의 사회적 진출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사회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호족은 신라말고려초의 사회변동을 주도한 지방세력이었다. 호족은 경주 중심진골 중심의 신라골품제사회를 해체하고 각지의 지방민과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지배체제에 참여할 수 있는 보다 개방적인 사회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 김갑동(1990), 나말여초의 호족과 사회변동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윤경진, 나말여초 성주의 존재양태와 고려의 대성주정책
* 임형택(1981), 나말여초의 ‘전기’문학, 한국한문학연구, 제5집, 한국한문학연구회
* 정청주(1996), 신라말 고려초 호족연구, 일조각
* 추만호(1992), 나말여초 선종사상사 연구, 도서출판 이론과 실천
* 한국사강론, 국사교재편찬위원회 형설
* 한국고대사연구회(1994), 신라말 고려초의 정치·사회변동, 도서출판 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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