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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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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항일독립운동
1. 독립 운동 기지의 건설
2. 무장 독립군의 항일 전쟁과 시련

Ⅲ. 항일무장투쟁

Ⅳ. 항일민족운동
1. 3․1운동
2. 청년회운동
3. 노농운동

Ⅴ. 항일의병운동

Ⅵ. 항일학생운동
1. 제1차 항거
2. 제2차 항거

Ⅶ. 항일지방유생투쟁
1. 의병의 독립군으로의 전환
2.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활동

참고문헌

본문내용

병찬은 1912년 9월 홍주의병 참모사로 참여하고 역시 대마도에 유배되었던 이칙(호; 신구당, 1873~1936)으로부터 고종의 밀지를 전달받았다. 임병찬은 그해 11월 격문을 발송하여 고종의 뜻을 인근의 유생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중화적 민족주의에 바탕하고 있는 격문에서 그는 신하된 자들은 재산을 보호하는데 급급하여 ‘훼형역복’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빈궁한 자들은 구복을 채우고자 순사보조원에 투신하는 등 본성을 잃었다고 하면서, 이로써 나라를 두 번 잃고 말았다고 통탄하였다. 이어서 그는 ‘토적복수’할 것을 선언하고 군수에서부터 주사, 순사보조원, 면장, 이장, 영수원, 용사에 이르기까지의 ‘수이관리’도 칼을 거꾸로 세워 토적하여 죄를 씻을 것을 요구하였다.
임병찬은 1913년부터는 동지 초모 작업을 개시하였다. 2월 4일에는 아들인 임응철을 서울로 보내 전참판 이명상과 김재순을 비롯한 동문인 곽한일·전용규 등을 만나게 하여 거사를 협의케 하였다. 2월 7일에는 손자인 임태흥을 진안, 장수, 무주, 용담, 금산, 진산, 고산, 익산 등 8개군에 보내 충신의사의 후예를 찾아 만나게 하였으며, 문형모를 옥구, 임피, 함열, 용안, 익산으로 보냈다. 2월 15일에는 송재준과 김사문을 옥과, 곡성, 순천, 낙안, 보성 지역에 보내고, 임화지·신보현·임창현 등을 옥구에 보냈다. 2월 20일에는 장현갑과 송영태를 전주, 김제, 금구, 만경, 옥구 등지에 보냈다. 이 과정에서 3월 1일에는 흥덕의 김재구가 태인헌병분견소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계속하여 비밀리에 각지를 돌며 동지를 초모하여 많은 인사가 합류하였다. 1914년 2월 15일 임병찬은 가묘에 제사를 올리고 투쟁의 뜻을 밝혔다. 다음 날 권재일, 김병풍, 이재우 등을 서울로 보내 서울 인사들의 합류를 부탁하게 하였다. 2월 25일 서울 측에서 전참판 이명상과 이인순을 비롯하여 곽한일과 채상덕이 내려왔다. 3월 10일에는 윤병일이종묵조재학이기상강봉주이기영안태준변환이은영정철화이규홍송주환이중원 등이 왔으며, 3월 23일 임병찬은 이명상, 이인순 등과 함께 다음과 같이 각도와 각군 대표를 선정하였다.
- 총대표 명단
임병찬 민정식 이명상 이인순 조형하
곽한일 채상덕 김용응 전용규 조재학
최만식 이승욱 고석진
- 각도 대표 명단
경기도 최영설 충청도 유준근
경상도 권진원 전라도 이중익 최영풍 오계엽 박재구 이권제
강원도 서상렬 함경도 김성문
평안도 이도성 황해도 유응두 오창근 송낙선
이어서 각 군 대표 총 302명을 선임하였는데, 그 명단은 표1)과 같다.
각 군 대표 302명의 분포를 보면, 전라도가 211명(전북; 136, 전남; 75)으로 전체의 70%, 다음에는 충남이 43명으로 14%를 차지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독립의군부는 전라도와 충남의 유생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들은 또한 주로 최익현과 임병찬의 문인들로 태인의병에 참여했던 이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충남지역은 안병찬안항식유준근이식곽한일문석환박윤식남규진 등 최익현 문인이거나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주로 선임되었다. 익산의 이규홍, 문경의 이승재, 면천의 정주원처럼 의병 출신들이 다수 선임되었다. 임병찬은 위와 같은 조직을 마친 후 날짜를 정해 전국의 각 군에서 일제히 국권반환과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장서투서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투서하기 2일전에 각 군의 사직단 터에 태극기를 게양하여 민심을 움직이게 하였으며, 투서 후에는 향약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수원군 대표 김창식이 청양에서 체포되어 조직이 발각됨에 실행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임병찬은 개인적인 투쟁에 돌입하여 우선 총독에게 글을 보내 면회를 요청하였다.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일본경찰부 경무총감 입화소일랑과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일본의 한국병합은 일본에 큰 재앙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어서 그는 일본 내에서도 반대하는 기운이 있으며 중국 역시 반드시 한국에 도움을 주어 복수를 할 것이니 결국 동양 3국이 서로 죽이고 해쳐 조개와 도요새의 싸움(방휼지세)에서 결국 어부의 공은 서양의 몫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임병찬은 서울 필동에 묶으면서 일본총리와 조선총독에게 장서를 보냈다. 윤5월 23일 총독에게 보낸 글에서 그는 ‘순천자흥 역천자망’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한국의 국권을 반환하는 것이 하늘에 따르는 것이며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서 한국의 주권을 회복시켜 천하에 대의를 펼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6월 1일 다시 이들에게 장서를 보냈다. 결국 그는 이 일로 6월 3일 총감부에 체포되어 구속되었으며, 6월 13일 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목으로 1년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는 거문도에서 1년형을 마칠 무렵인 1915년 6월 다시 1년형이 추가되어 유배 중이던 1916년 5월 23일 유배지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1910년 국망 후 지방유생이 조직한 비밀결사로 독립의군부 외에도 1914년 9월 경북지역에서 조직된 민단조합이 있다. 민단조합은 이동하이은영김낙문최욱영노병직강병수조용필 등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였던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여기에 이강년의 생질인 이식재와 홍주의병 중군장였던 이세영 등이 합류하였다. 민단조합 단원들은 이은영처럼 독립의군부에 가담한 이도 있으며, 강병수처럼 풍기광복단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만주를 오가면서 동지적 결속을 도모하였으며, 군자금 모금을 주요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1915년 군자금 모금과정에서 이동하를 비롯한 요원들이 체포되어 조직이 해체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강만길 외 /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 역사비평사, 2000
김진식 / 1907∼1910년 경기지방 의병항쟁의 성격, 경기문화연구제6집, 인천교육대학 기전문화연구소, 1975
김홍장 / 마을 탐방 15 석문면 난지도리, 의병총 난지도 해수욕장 위치, 주간 당진신문제114호, 1994
송정현 / 조선사회와 임진의병 연구, 학연문화사, 1998
안병직·박성수 외 / 한국 근대 민족운동사, 돌배게, 1980
정세현 / 항일학생민족운동사 연구, 일지사, 1975
조동걸 / 한말의병전쟁, 독립기념관,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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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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