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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예술][예술론][건축예술론][사진예술론][인터넷시대 예술론][대중문학 예술론][단토 예술론]예술의 정의 고찰과 건축예술론, 사진예술론, 인터넷 시대의 예술론, 대중문학의 예술론, 단토의 예술론 분석(예술, 예술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예술의 정의

Ⅲ. 건축예술론
1. 건축의 크기
2. 배치

Ⅳ. 사진예술론
1. 자연언어와 연상언어
2. 사진의 위치
3. 사진의 분류
1) 응용사진
2) 순수사진

Ⅴ. 인터넷 시대의 예술론

Ⅵ. 대중문학의 예술론

Ⅶ. 단토의 예술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팔을 올리는 것--간의 차이를 문제삼았던 비트겐슈타인에게 깊이 영향을 받은 단토는 예술에 대해 그와 연관된 문제를 제기했다. 그의 물음은 두 개의 식별불가능한 대상들--예를 들면, 두 개의 똑같은 그릇--이 하나는 예술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이 아닐 때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차이는 예술 작품들이 일상적인 대상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에 관여한다는 사실에 있다. 예술과 철학은 모두 언어가 기술적으로 사용될 때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실재에 대해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은 항상 표상적인 것이지만, 예술이 어떤 것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예술가가 지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전달하기도 한다는 의미에서 표상적이다. 예술은 흔히 그 이전에 만들어진 예술들을 지시하는데, 예술이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는 피카소가 영감을 얻어 그의 낡은 넥타이 하나에 밝은 푸른색 물감을 칠했다고 상상해 본다. 물감은 매끈하고 조심스럽게 칠해져 있고 붓질의 모든 자취가 깨끗이 사라져 있다. 이것은 붓질 자체의 부정을 표상한다. 이것이 예술 작품이라면 그것은 회화의 역사와 이론 자체에 대해 무엇인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넥타이에 그 비슷한 얼룩을 만든 어린아이가 예술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얼룩진 넥타이는 어떤 것도 지시하고 있지 않다.
피카소의 넥타이가 예술 작품이라는 사실은 그 넥타이가 변용되지 않은(untransfigured) 유사물이 결여하고 있는 속성을 갖고 있음을 말한다. 상상 속의 어린아이와 피카소의 두 넥타이들의 차이는 존재론적 차이이며 결코 제도적인 차이가 아니다. 피카소의 넥타이가 갖게된 미적 속성들은 그 작품의 역사적 그리고 이론적--즉 해석이 부여된--동일성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해석은 예술 작품의 존재에 필수적인 것이며, 그러한 해석은 항상 예술 이론이라는 분위기(atmosphere), 예술사에 대한 지식을 통해 알려진다고 단토는 주장한다.
단토에 의하면, 예술 작품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표상이다. 그러나 예술은 신문 기사들(역시 해석을 필요로 하는 표상)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예술 작품은 자신의 내용에 대해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자기 지칭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지칭적인 보고서나 기술들이 모두 예술인 것은 아니라는 명백한 반론이 가능하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단토의 답은 예술 작품은 단순한 표상이라기 보다 변용적 표상이라는 것이다. 예술은 자기 자신에 대해 언급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변용시키고 따라서 단순한 물리적 대상이 스스로 소유할 수 없는 속성들을 획득한다.
이러한 주제들은 심오하게 시사적이기는 하지만 설명하는 바가 항상 명확하고 판별적인 것은 아니다. 철학적 텍스트도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 지시적이며 변용적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이것은 철학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철학이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을 인지하고 단토는 후기 저작(1986)에서 보완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중요한 관심의 촛점은 철학이 전통적으로 예술을 압박하고 공민권을 박탈(disenfranchisement)하려고 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술을 왜소화시킨 것은 단지 플라톤이나 칸트의 저작, 더 나아가서 전통 미학 자체인 것만은 아니다. 헤겔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변기[Fountain]를 통해 가장 유명해졌던 뒤샹이 성취한 것은 역사에 대한 헤겔의 엄청난 비젼을 놀랍도록 승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역사적 차원을 통해 자신에 관한 의식을 드러내는 것처럼, 뒤샹의 예술은 예술의 철학적 본성에 관한 문제를 예술 내에서 제기한 것이다. 헤겔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술은 그 자신을 주변으로 밀어내고 공민권을 스스로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플라톤이 원했던 바였다: 예술이 철학으로 전환한 것이다.
단토가 예술의 공민권 박탈을 재시도한 것은 예술 작품들이 단순히 무관심적인 쾌를 위한 주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예술과 해석 간의 관계에로 관심을 전환하는 것을 포함한다. 정확히 똑같아 보이는 두 개의 눈삽들 중의 하나가 예술 작품일 수 있는 까닭에, 눈삽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눈삽의 미적인 외관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식별불가능한 대상들은 판별적이고 상이한 해석이 채색됨으로써 전혀 다르고 고유한 예술 작품들이 되는 것이다.
해석에 대한 단토의 설명은 모호하다. 눈삽이 예술 작품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일상적인 의미의 해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이론들과 문화적 관례들에 대한 지식에 달려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필요한 지식을 갖고 있다면, 그는 눈삽이 예술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깨달음은 그가 작품을 이해하는가 여부와는 무관한 것이다. 만일 작품을 보고 혼란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그 이유를 설명해보려 할 것이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해석하려고 애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과정이긴 하지만, 단토는 양자를 한꺼번에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토는 예술에게서 공민권을 박탈하는 철학의 토대가 무엇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예술은 고유류(sui generis)로서, 제거불가능한 것(ineliminable)으로서, 비잉여적인 것(nonredundant)으로서, 또는 일상성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옹호되어야만 할까? 만일 예술이 단토가 제시하는 것처럼 해석에 의존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라면, 왜 이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일종의 공민권 박탈이 실시되지 않는 것인가? 단토의 저작들은 예술 철학의 많은 흥미로운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이러한 물음들에 답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참고문헌
미하엘슈튀르머, 20세기 포토 다큐 세계사 4(독일의 세기), 북폴리오, 2007
수잔K·랭거, 예술이란 무엇인가, 고려원, 1982
윤장섭, 서양 건축사, 동명사, 1990
자연과학·공학, 건축예술의 체득, 건축의장론
지명렬, 독일 문학사조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E.H.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예경, 1997
S.E.라스무셴 저, 윤일주 역, 자연과학/공학, 건물예술의 체득, 야정문화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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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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