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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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일에 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독일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한국과의 관계

본문내용

멘델스존, 바그너 등이 있다. 20세기 독일 음악은 후기 낭만파 음악과 표현주의 음악으로 시작되는데, 후기 낭만파에는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초기 쇤베르크가, 표현주의 음악에는 후기 쇤베르크가 대표적인 음악가이다. 특히 쇤베르크는 후기 낭만주의에서 시작해 표현주의 음악을 태동시켰으며, 비록 오스트리아 출생이지만 베를린 예술아카데미 교수로 재직하면서 독일 현대 음악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또한 쇤베르크는 베르크와 베버른을 수제자로 키워냈으며 그들이 모두 오스트리아 출신이기 때문에 '제2의 비인 음악파'라 불리기도 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신고전주의 음악이라고 불리는 사조가 등장하는데 힌데미트가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총렬주의 음악이라는 것이 널이 퍼지는데 대표적인 음악가로 슈톡하우젠이 있다. 독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 연주자, 성악가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는데, 지휘자로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이 있고, 연주자로는 바이올리니스트 안네-조피 무터, 트럼펫 연주자 루트비어 귀틀러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성악가로는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프리츠 분덜리쉬, 헤르만 프라이, 힐데가르트 베렌스, 페터 호프만 등이 유명하다.
독일 전역에는 약 100여 개의 오페라하우스와 200여 개의 전문 오케스트라단이 있다. 유명한 극장으로는 도이치·함부르크·베를린·뒤셀도르프·만하임·뮌헨·드레스덴극장 등을 들 수 있다. 현재 열리고 있는 중요한 음악행사로는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음악제, 가을철의 베를린 음악제, 할레·괴팅겐의 헨델 음악제, 본의 베토벤 음악제, 아우크스부르크의 모차르트 음악제, 뮌헨·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슈트라우스 음악제 등이다.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 밤베르크 교향악단, 슈투트가르트 실내 관현악단,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등은 세계 최정상의 오케스트라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르네상스 이전 독일회화는 주로 종교적 주제를 다루었는데 걸작은 로흐너와 쾰른파의 제단 예술작품들이었다. 15세기 후반 뒤러가 순수풍경화를 그렸으며, 낭만주의에 이르러 프리드리히의 풍경화가 각광을 받았다. 20세기 초에는 표현주의 화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바우하우스 운동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바우하우스 운동은 디자인의 효시로서 단순히 순수회화에 머무르지 않고 미술과 일상생활의 결합을 시도했다. 종합조형학교 교수였던 칸딘스키와 클레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바우하우스 운동의 전통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독일의 건축은 20세기에 들어 유럽 전역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바우하우스 풍의 형식이 그로피우스와 미스에 의해 퍼져나갔다.
●한국과의 관계
한국이 처음으로 독일과 공식외교관계를 맺게 된 것은 1883년(고종 20) 11월 조선 전권대사 민영목(閔泳穆)과 주일(駐日) 요코하마[橫濱] 독일총영사 자페 간에 한·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부터이다. 이에 따라 독일측은 1884년(고종 21) 총영사관을 개설, 앞서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와 있던 P.G.묄렌도르프의 한옥에서 외교사무를 개시했으며, 첫 외교관으로 같은 해 5월에 부영사 부들러, 8월에 총영사 O.젬브쉬가 각각 부임하였다.
조선과 수교를 맺었던 당시의 독일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체제하에서 외교관계를 재정비하고 총력을 기울여 국력의 충실을 다지던 때로서, 치열한 경쟁상대였던 프랑스를 제치고 대조선외교에 기선을 잡았다. 조선정부에 외교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이러한 공식 채널의 외교 통로보다도 개인적으로 조선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취임하여 대외정책에 깊숙이 관여한 묄렌도르프였다. 한국이름 목인덕(穆麟德)으로 통한 그는 톈진[天津] 주재 독일영사로 있다가 1882년(고종 19)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협판(協辦)에 임명되어 크고 작은 외교문제에 관여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됨에 따라 다른 외국공관과 함께 1906년 철수함으로써 불과 20년 남짓한 조선시대의 한·독 외교관계는 단절되고, 반세기가 지난 제2차 세계대전 후 양국이 동·서, 남·북으로 각각 분단되었으며, 1957년 대한민국과 서독정부가 상호 승인을 교환함으로써 다시 공식 교류가 시작되었다. 1964년 2월 투자보장협정, 1965년 4월 무역협정, 1966년 9월 기술협력협정, 1970년 5월 문화협정, 1972년 11월 사증면제협정, 1978년 5월 2중과세 방지협정, 1986년 과학 기술협력협정, 1986년 원자력 협정, 1995년 항공협정, 2000년 사회보장협정, 2004년 입국 또는 체류요건에 부합하지 아니하거나 더이상 부합하지 아니하는 사람의 인수에 관한 협정 등이 체결되었고, 2005년에는 입국, 체류협력에 관한 양해각서가 발효되었다.
1964년 12월에는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서독을 방문하였고, 1967년 3월에는 서독의 대통령 뤼브케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1986년 대통령 전두환, 1989년 대통령 노태우가 방문하기도 하였다. 1992, 1993년에는 독일 대통령 바이츠제커와 총리 콜이 방한한 것을 비롯하여 1995년 대통령 김영삼이 독일을 방문하여 독일통일 후 양국간의 교섭이 크게 증대되고 있다. 또한 1998년 헌법재판소장 림바흐가 방한하였다. 독일은 남북당사자간 직접 대화에 의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지지하고 UN(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진출, OSCE(구주안보협력기구) 상시적 지위확보 등에 관련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일찍이 1960년대 초에 한국의 간호사· 광산근로자 등이 서독으로 진출하여 2003년 기준으로 교민 16,673명, 상사주재원·유학생 등 체류자 13,141명이 거주하고 있다. 2006년 기준으로 대한 수입 총액은 100억 5,800만 달러, 수출 총액은 113억 3,700만 달러로 약 13억 달러의 무역 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독일은 2006년도 말 기준으로 한국의 제6위 수출국이자 수입국이다. 주요 수출품은 반도체, 선박, 무선통신기기, 자동차, 컴퓨터 등이 이며,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 정밀 기계류, 반도체, 화학공업제품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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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2.24
  • 저작시기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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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69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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