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흥사지, 정지사지, 공주정지산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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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왕흥사지, 정지사지, 공주정지산유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왕흥사지 (王興寺址)

Ⅰ. 개 관

Ⅱ. 가람배치

Ⅲ. 발굴조사

Ⅳ. 발굴성과

Ⅴ. 왕흥사지 기와 가마터 발굴조사

정림사지 (定林寺址)

Ⅰ. 개 관

Ⅱ. 발굴조사

사명이 새겨져있는 명와

공주정지산유적(公州艇止山遺蹟)

Ⅰ. 개관

Ⅱ. 유적

※ 참고문헌

본문내용

동일하지만 2호 건물지는 규모도 조금 작고 형태상의 차이점도 있으므로 아마 그 용도가 달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2호 건물지 주변에는 기둥이 많고 새로 목책열을 세우거나 보수한 예가 확인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대벽건물지 내부에서는 목책공이나 주공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점은 목책열과 3동의 건물이 동시기였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남사면의 4棟 역시 부속시설이다. 남사면의 목책은 최소한 3줄 이상이며 약간의 시기차가 있다. 이와 관련지어 5호 건물지가 4호 건물지보다 약간 선행할 것으로 보인다.
③ 구덩이유구
구덩이유구는 능선의 정상부와 남사면의 윗부분에서 6기가 확인되었는데, 2호의 타원형과 3호의 장타원형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면이 말각방형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 중 1호 수혈에는 암거(暗渠)형태의 구(溝)가 부설되어 있고 구의 바닥에는 수키와를 연결한 관(管)시설이 있다. 6호 수혈 또한 와관(瓦棺)은 없으나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부에는 회색의 진흙층이 두텁게 깔려 있으며 목탄이 섞인 층도 확인되었다고 한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들 수혈은 얼음을 저장한 빙고(氷庫)일 가능성이 크며, 이는 빈전과 유기적인 관련을 이루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길식은 이 유적이 27개월 동안 왕비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조성한 빙고라는 추론을 내놓았는데 내부에 쌓인 진흙은 고체인 얼음이 서서히 녹으면서 생긴 끈끈한 점액질이라는 것이고, 목탄이 섞인 층은 겨울철 인근 금강에서 채취한 얼음이 쉽게 녹지 않도록 짚, 솔가지등의 보냉재와 함께 빙탄으로 사용했던 목탄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얼음이 녹으면 배수관을 통해 밑에 설치된 소형 구덩이로 물이 흐르고 백제인들은 이 집수시설에 고인 찬물을 이용했을 것 이라는게 그의 주장이다.
④ 출토유물
정지산 유적의 시설물 내외에서는 화려한 장식이 부착된 장고형기대 약 10여점, 뚜껑접시 약 20여점, 삼족토기 10여점, 벽돌 5점과 기와를 비롯하여 화려한 문양에다가 매우 잘 구워진 양질의 토기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렇게 출토된 유물들 또한 정지산유적을 무령왕비의 빈전으로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로 들 수 있는 데 기대라는 용기의 종류가 사용 장소 및 용도에 따라 다른 기능을 수행하였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제사 용기로 많이 사용한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정지산에서도 제사 행위가 이루어 졌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유적에서 출토된 개배중의 일부가 일본 ‘스에키’ 개배의 제작방법이 적용된 사례가 보이는데 이러한 외래계 유물의 경우는 아마도 왜와의 교류과정에서 유입된 유물로 이해되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목관의 수종 또한 일본산이라는 점을 생각해 봤을 때 무령왕비의 상례가 치러지는 동안 일본에서 조문사절이 파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⑤ 무령왕릉 출토 매지권과 정지산 유적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매지권(買地券)에 정지산 유적에 관한 내용이 간접적으로 나와 있는데, 그것은 매지권 앞면에 표기된 ‘매신지위묘(買申地爲墓)‘ 라는 표현과 뒷면의 ’거상재유지(居喪在酉地)‘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 말은 ’남서방향의 토지를 매입하여 능묘를 만들고‘ 라는 뜻과 ’서쪽의 땅에서 상(裳)을 지내고‘ 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매지권에 표기된 방향의 중심지를 공산성으로 본다면 신지(申之)에 해당하는 남서방향은 무령왕릉을 가리키는 것이며, 유지(酉地)인 서쪽방향은 정지산이 위치한 곳에 해당하기 때문에 정지산에 상(喪)을 지내기 위한 시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3. 정지산 3기 유적(6세기 중엽)
국가시설물이 폐기된 후 7세기대의 돌방과 독널무덤이 축조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보다는 적어도 반세기 이전에는 폐기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① 돌방무덤(石室墓)
돌방무덤은 능선의 남쪽 사면에서 백제시대의 앞트기식돌방무덤 1기와 파괴가 심하여 규모나 시기를 판단하기 어려운 2기가 확인되었고, 67호 대벽건물지와 중복되어서 고려시대의 앞트기식돌방무덤 1기가 확인되었다.
■ 1호묘
백제시대 앞트기식(橫口式) 돌방무덤으로 내부구조는 단면 사각형이며 돌방 바닥 전면에 평와(平瓦)를 2겸 깔았다. 널못이 길이 1.8m, 너비 0.7m의 범위 내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단장(單葬)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그릇받침편을 비롯하며 세발토기 널고리, 널못, 반뚜껑, 뚜껑편, 암키와편, 수키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 234호묘
2호묘는 7호주거지와 중복, 3호묘는 35호 주거지와 중복되며, 둘다 파괴가 심하여 정확한 규모나 구조, 시기는 알수 없다. 4호묘는 고려시대 횡구식석실묘로 능선의 남사면 중단부분에서 대벽건물지 67호와 중복된 채 조사되었다. 바닥면은 생토면이고 벽석은 잘 다듬지 않은 돌을 쌓아 축조하였다.
② 독널무덤(甕官墓)
백제시대의 것으로 능선의 남사면과 서사면에서 각 1기씩 확인되었다. 독널무덤은 독의 절반정도를 깨뜨려낸 다음 시신을 안치하고 입구는 판석으로, 저부쪽은 토기편이나 기와편으로 밀봉하였고, 독널무덤의 독널은 횡으로 안치하였으며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③ 화장무덤(火葬墓)
통일신라대의 것으로 능선의 정상부와 남사면에 걸쳐 19기가 집중 분포하고 있으며, 구조는 직경 약 0.3m 내외의 광(壙)을 파고 그 안에 장골용기(藏骨容器)를 매납하고 있다. 장골용기는 대부분 인화문(印花文)의 토제 유개완(有蓋椀)이며, 3점은 납석(蠟石)을 깎아 만들었다.
④ 고려시대 움무덤(土壙墓)
능선의 정상부와 서북사면에서 22기가 조사 되었다. 주축의 방향은 대체로 등고선과 평행하며 대부분 널못만 출토되는데, 19호 묘에서는 쌍룡문경이 출토되었으며, 2호 묘에서는 청자가 출토되었고, 5기의 토광묘에서 철제 대금구가 출토되었다.
※ 참고문헌
- 국립공주박물관, 현대건설, 『(백제의 제사유적) 정지산』, 국립공주박물관, 1999
- 이남석, 『웅진시대의 백제고고학』, 서경, 2002
- 이도학, 『살아있는 백제사』, 휴머니스트, 2003
- 이인숙, 『유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푸른역사, 2000
- 최광식, 『백제의 신화와 제의』, 주류성, 2006
- 이남석,「백제 문화의 이해」, 서경문화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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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1.24
  • 저작시기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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