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삼국통일 전후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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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 삼국통일 전후의 사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론

Ⅱ.본론
1. 여왕의 즉위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
2.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세력 관계
3. 신라의 삼국통일과 그 역사적 의의
4. 백제 고구려의 부흥운동
5. 통일신라의 민족융합정책

Ⅲ.결론

본문내용

대한 적극적인 포섭회유였다. 무열왕 7년(660)에 투항한 백제 지배층 인사들에게 백제에서의 지위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배정하여 신라 지배층집단으로 편입하였다. 또한 문무왕 10년(670)에는 고구려부흥군인 검모잠(劍牟岑)이 패강 남쪽에 이르러 당의 관리와 승(僧)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여 고구려 왕족인 안승(安勝)을 받드니,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삼고 함께 대당전쟁에 나서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백제 및 고구려인에 대한 포섭과 원조는 같은 종족이라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관리 등용에 있어서도 삼국에 대해서 평등한 기회가 주어져
백제 및 고구려인에 대한 포섭 정책은 통일을 완료한 이후에는 하나의 국민으로 융합하려는 정책으로 발전하였다. 문무왕 13년(673)에는 백제에서 온 사람들에게 본국의 관직에 따라서 신라의 관직과 관등을 일률적으로 주었고, 신문왕 6년(686)에는 고구려인에게도 본국에서의 관품을 헤아려 역시 일률적으로 관등을 주었다. 이는 백제와 고구려 지배층을 신라의 관리로 수용함으로써, 민족융합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지배층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까지 한 국가의 국민으로 융합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였다. 이를 위해 확대된 전국토를 일원적인 행정조직으로 개편하였다. 신문왕 5년에 전국 을 9주(州)로 나누고 그 밑에 군(郡)과 현(縣)을 두었으며, 지방 요지에 5소경(小京)을 설치하였던 것이 그것이다. 이 때 9주는 옛 신라 땅에 3주, 옛 백제 땅에 3주, 옛 고구려 땅에 3주를 각각 균분한다는 원칙이 표방되었으나, 옛 고구려 땅이란 것은 실제로는 이미 신라에 편입되어 있던 것이었다.
신라가 우위에 있기는 하나, 고구려백제가 자연스럽게 융합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 따라서 3주씩 균분한다는 원칙은, 실제적인 것이기보다는 통일 후 옛 삼국에 동등한 지분을 부여함으로써 민족적 융합을 이끌어 내겠다는 정치적 표방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신문왕 대에 중앙 군단인 9서당(誓幢)을 편성함에 신라인 뿐 아니라 고구려인과 백제인, 더 나아가 말갈인까지 포괄하였다는 것은 피정복인에 대한 포섭과 회유의 단계를 넘어서 보다 높은 차원의 민족융합을 지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라는 '일통삼한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하나의 국가조직 안에 편입시켜 동일한 국민화정책(國民化政策)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물론 신라인의 우위가 전제된 것이었겠지만, 동일한 국가조직안의 동일한 국민이라는 관념이 점차 자리를 잡아갔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면에서 삼국통일에 대해, 한국민족 형성의 기반을 확충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의미 부여는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Ⅲ.결론 (느낌)
여성의 능력을 중시하여 여성과 남성의 차별이 없는 사회가 당시의 신라사회였고, 이로 인해 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사회가 신라 사회였다. 당시 신분제의 힘을 빌리지 않고선 있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사회보다 여성과 남성의 차별이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여성의 신분이 낮아지게 된 것은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 때문에 발생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존여비의 사상으로 여성의 지위가 낮아지고 여성은 가사를 중심으로 사회에 진출하는 일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유교적 사상이 아직까지 남아있어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다지 반갑지 않은 게 현대의 모습이다. 이것은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커짐에도 천년 전의 시대보다 뒤떨어진 사고를 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모순이 아닌가 싶다.
또 다른 한편으로 교수님께서 수업 중에 말씀하셨듯이 굳이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그다지 낮지 않았음과는 별개로 진덕성덕 여왕이 왕이 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위기를 타개하는데(즉, 그 위기란 구 신 귀족간의 갈등이 일어 그 갈등의 해소를 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여성의 여왕 즉위가 가능 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 또한 나에겐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이것은 수업을 듣기 전까진 고등학교 교육상으론 알 수 없는 중요한 사실임에 틀림없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해서 당나라와 협력하여 한반도 전체가 아닌 부분적인 통일을 완수함으로 인해 현대에 들어, 최초의 통일이라는 칭찬보다는 반민족적이고 외세 의존적이라는 비난을 더 많이 듣고 있다. 이러한 신라의 통일의 모습에 우리는 긍정적 시각과 부정적 입장을 알아 볼 수 있었고, 여기서 내 입장을 밝혀 보라 한다면 그 때 당시로선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기에 외세 의존적이며 한반도 이남의 부분적인 통일이라 할지라도 통일을 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현대 사람들이 ‘만약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았다면 고구려가 얼마만큼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현재 우리나라의 면적이 얼마나 커졌을까?’ 라고 생각할 때면 나는 ‘만약 신라가 당과의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과연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존재 했을 것이며,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을까?’ 하고 반문해본다. 결국 신라의 통일은 비록 부분적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대단한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신라의 삼국통일 후...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민족의 부흥을 위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부흥운동은 신라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 그들의 민족을 다시 찾고자 한 운동이었다.
이러한 부흥운동을 수습하고 통일 전부터 마련해 온 여러 민족융합정책들을 폄으로써 최초의 통일왕조인 통일 신라를 이룩하였다. 이처럼 통일을 이룩한 신라를 본받아 우리도 지금의 분단된 상황을 타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신라에서 내세운 ‘삼한일통(三韓一統)의식’ 을 ‘이한일통(二韓一統)의식’ 으로 우리도 실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역사란 반복되기 때문에 앞의 상황들을 잘 살펴보면 위기를 잘 넘길 수 있다고 하질 않았던가....
그 폐쇄적이던 북한이 우리나라에서 개최하는 아시안 게임을 참여하는 마당에 우리 개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이제는 좀더 제도적으로 민족융합정책을 실행할 때가 아닐까?
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신라...
그 유구한 역사는 삼국의 통일이라는 커다란 씨앗이 발아하여 더욱 빛을 발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키워드

신라,   사회,   통일,   백제,   고구려,   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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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10.04.21
  • 저작시기2005.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0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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