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선덕여왕 드라마와 실제 역사기록들을 비교하여 실제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사건 중 하나를 골라 역사적 사고의 요건에 비추어 볼 때 그 사건이 드라마에서 어떻게 변형되었으며, 그 역사적 의미가 현재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재해석되었는지를 정리해보자
2. 드라마 <선덕여왕>의 극적상황과 역사적 사료에서 나타나는 덕만 또는 선덕여왕의 행태에서 읽혀지는 '이성'과 당대의 상황을 반영한 이데올로기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 양상은 어떻게 다르거나 혹은 같은지를 규명해보자.
2. 드라마 <선덕여왕>의 극적상황과 역사적 사료에서 나타나는 덕만 또는 선덕여왕의 행태에서 읽혀지는 '이성'과 당대의 상황을 반영한 이데올로기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 양상은 어떻게 다르거나 혹은 같은지를 규명해보자.
본문내용
不瞬, 人物過前而不之省. 旣而言曰: "嗟乎! 大丈夫豈不能呑<百濟>乎!" 便詣王曰: "臣願奉使<高句麗>請兵, 以報怨於<百濟>." 王許之. <高句麗>王<高臧>素聞<春秋>之名, 嚴兵衛而後見之. <春秋>進言曰: "今<百濟>無道, 爲長蛇封豕, 以侵 我封疆. 寡君願得大國兵馬, 以洗其恥, 乃使下臣致命於下執事." <麗>王謂曰: "<竹嶺>本是我地分, 汝若還<竹嶺>西北之地, 兵可出焉." <春秋>對曰: "臣奉君命乞師, 大王無意救患以善隣, 但威劫行人, 以□□{要歸} 地, 臣有死而已, 不知其他." <臧>怒其言之□□{不遜} , □{囚} 之別館, <春秋>潛使人告本國王. 王命大將軍<金庾信>, 領死士一萬人赴之. <庾信>行軍過<漢江>, 入<高句麗>南境, <麗>王聞之, 放<春秋>以還. 拜<庾信>爲<押梁州>軍主.
"11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8월에 다시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 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왕이 사신을 당 나라로 보내 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통보하였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도독 이찬 품석과 사지 죽죽·용석 등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겨울에 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대야성의 패배를 보복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애초에 대야성이 패했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가 여기서 죽었다.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온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사람이나 물체가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얼마 후에 "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이길 수 없으랴!"하고는 곧 왕에게 나아가 "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제가 고구려에 가서 군사의 파견을 요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고구려왕 고장은 원래 춘추에 대한 명성을 듣고 있었다. 그는 먼저 군사의 호위를 엄하게 한 뒤에 춘추를 만났다. 춘추가 말했다.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대악당이 되어 우리 국토를 침범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임금이 귀국의 군사를 얻어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를 보내어 하집사에게 명령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고구려왕이 말했다.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인데 너희들이 만약 죽령 서북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파견할 수 있다."
춘추가 대답했다. "제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빌리고자 하여 왔으나, 대왕께서는 이웃의 환난을 구원하여 이웃과 잘 지낼 뜻은 없고, 다만 남의 나라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니, 저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이 공손하지 않자 고장은 분노하여 그를 별관에 가두었다. 춘추는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본국 왕에게 이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왕은 대장군 김유신에게 명령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가도록 하였다. 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고구려의 남쪽 변경으로 들어가자,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十四年, 春正月, 遣使大<唐>貢獻方物. <庾信>自伐<百濟>還, 未見王, <百濟>大軍復來寇邊. 王命□□{<庾信> /拒之 }, 遂不至家, 往伐破之, 斬首二千□{級} . □□{三月} , □□{還命} □於王, 未得歸家, 又□{急} 報<百濟>復來侵. 王以事急, 乃曰: "國之存亡, 繫公一身, 庶不憚勞, 往其圖之!" <庾信>又不歸家, 晝夜鍊兵. 西行道, 過宅門, 一家男女, 瞻望涕泣, 公不顧而歸. 三月, 創造<皇龍寺>塔, 從<慈藏>之請也. 夏五月, <太宗>親征<高句麗>, 王發兵三萬以助之. <百濟>乘虛, 襲取國西七城.
"14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유신은 백제를 치고 돌아와서, 아직 왕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대부대의 백제군이 다시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은 유신에게 출정을 명하였다. 유신은 집에도 가보지 못한 채 출정하여 백제군을 격파하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3월에 유신이 돌아와 왕에게 복명하고 아직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백제가 다시 침노한다는 급보가 왔다. 왕은 사세가 급하다고 판단하고 유신에게 말했다. "나라의 존망이 공의 한 몸에 매었으니, 노고를 마다하지 말고 가서 대책을 모색하라!" 유신은 또 다시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가 서쪽으로 행군하는 도중에 자기의 집 앞을 통과하게 되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나와 유신을 바라보고 눈물지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싸움터로 갔다.3월, 황룡사 탑을 세웠다. 이는 자장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여름 5월, 당 나라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 3만을 동원하여 이를 도왔다.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서쪽의 일곱 성을 빼앗았다." 三國史記, 김부식 저, 신호열 역해, 동서문화사, 2007, p114~116
이렇게 선덕여왕 재위기간동안 신라는 당에 조롱을 받고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수세에 몰려있으며 이 모든 수세와 위기를 해결하는 것은 선덕여왕의 역량이 아닌 그녀의 측근, 알천 춘추 유신 자장의 몫이다.
이렇게 볼 때 <선덕여왕> 현대적인 입장에서 사료 속의 선덕여왕을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떠오르는 가치는 자유와 평등이고 자주적 모습이다. 지배층의 권력독재가 난무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고 화합하는 세계관을 <선덕여왕>의 덕만도 보여주고 있다. 점차 사회가 다원화 복잡화됨에 따라 여성적인 유동성과 배려심, 화합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사료 속의 선덕여왕은 그 나름의 키워드를 맞춰 <선덕여왕>에서 리더십과 관용과 화합까지 겸비한 인물로 재탄생되었고 이것은 나름의 우리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천년의 왕국 신라, 김기홍, 창작과 비평사, 2000
삼국유사, 일연, 김월중 옮김, 민음사, 2007
선덕여왕을 클릭하면 큰 지혜가 보인다, 박순정, 오늘, 2000
한국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의 리더십, 김기홍, 2005
三國史記, 김부식 저, 신호열 역해, 동서문화사, 2007
"11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8월에 다시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 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왕이 사신을 당 나라로 보내 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통보하였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도독 이찬 품석과 사지 죽죽·용석 등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겨울에 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대야성의 패배를 보복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애초에 대야성이 패했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가 여기서 죽었다.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온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사람이나 물체가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얼마 후에 "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이길 수 없으랴!"하고는 곧 왕에게 나아가 "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제가 고구려에 가서 군사의 파견을 요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고구려왕 고장은 원래 춘추에 대한 명성을 듣고 있었다. 그는 먼저 군사의 호위를 엄하게 한 뒤에 춘추를 만났다. 춘추가 말했다.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대악당이 되어 우리 국토를 침범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임금이 귀국의 군사를 얻어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를 보내어 하집사에게 명령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고구려왕이 말했다.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인데 너희들이 만약 죽령 서북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파견할 수 있다."
춘추가 대답했다. "제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빌리고자 하여 왔으나, 대왕께서는 이웃의 환난을 구원하여 이웃과 잘 지낼 뜻은 없고, 다만 남의 나라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니, 저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이 공손하지 않자 고장은 분노하여 그를 별관에 가두었다. 춘추는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본국 왕에게 이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왕은 대장군 김유신에게 명령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가도록 하였다. 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고구려의 남쪽 변경으로 들어가자,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十四年, 春正月, 遣使大<唐>貢獻方物. <庾信>自伐<百濟>還, 未見王, <百濟>大軍復來寇邊. 王命□□{<庾信> /拒之 }, 遂不至家, 往伐破之, 斬首二千□{級} . □□{三月} , □□{還命} □於王, 未得歸家, 又□{急} 報<百濟>復來侵. 王以事急, 乃曰: "國之存亡, 繫公一身, 庶不憚勞, 往其圖之!" <庾信>又不歸家, 晝夜鍊兵. 西行道, 過宅門, 一家男女, 瞻望涕泣, 公不顧而歸. 三月, 創造<皇龍寺>塔, 從<慈藏>之請也. 夏五月, <太宗>親征<高句麗>, 王發兵三萬以助之. <百濟>乘虛, 襲取國西七城.
"14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유신은 백제를 치고 돌아와서, 아직 왕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대부대의 백제군이 다시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은 유신에게 출정을 명하였다. 유신은 집에도 가보지 못한 채 출정하여 백제군을 격파하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3월에 유신이 돌아와 왕에게 복명하고 아직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백제가 다시 침노한다는 급보가 왔다. 왕은 사세가 급하다고 판단하고 유신에게 말했다. "나라의 존망이 공의 한 몸에 매었으니, 노고를 마다하지 말고 가서 대책을 모색하라!" 유신은 또 다시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가 서쪽으로 행군하는 도중에 자기의 집 앞을 통과하게 되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나와 유신을 바라보고 눈물지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싸움터로 갔다.3월, 황룡사 탑을 세웠다. 이는 자장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여름 5월, 당 나라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 3만을 동원하여 이를 도왔다.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서쪽의 일곱 성을 빼앗았다." 三國史記, 김부식 저, 신호열 역해, 동서문화사, 2007, p114~116
이렇게 선덕여왕 재위기간동안 신라는 당에 조롱을 받고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수세에 몰려있으며 이 모든 수세와 위기를 해결하는 것은 선덕여왕의 역량이 아닌 그녀의 측근, 알천 춘추 유신 자장의 몫이다.
이렇게 볼 때 <선덕여왕> 현대적인 입장에서 사료 속의 선덕여왕을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떠오르는 가치는 자유와 평등이고 자주적 모습이다. 지배층의 권력독재가 난무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고 화합하는 세계관을 <선덕여왕>의 덕만도 보여주고 있다. 점차 사회가 다원화 복잡화됨에 따라 여성적인 유동성과 배려심, 화합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사료 속의 선덕여왕은 그 나름의 키워드를 맞춰 <선덕여왕>에서 리더십과 관용과 화합까지 겸비한 인물로 재탄생되었고 이것은 나름의 우리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천년의 왕국 신라, 김기홍, 창작과 비평사, 2000
삼국유사, 일연, 김월중 옮김, 민음사, 2007
선덕여왕을 클릭하면 큰 지혜가 보인다, 박순정, 오늘, 2000
한국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의 리더십, 김기홍, 2005
三國史記, 김부식 저, 신호열 역해, 동서문화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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