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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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시대적 배경

(1) 서양문명의 수용과 개화

(2) 개화파의 교육관

(3) 개화파의 기독교 인식

2) 기독교의 전개 과정

(1) 기독교의 선교정책

(2) 학교의 설립

본문내용

사상이 앞선 곳에 포교가 쉬웠고 또 기독교를 수용한 이들이 개화가 먼저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당시의 민중개화정도를 알아보는 척도가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2) 학교의 설립
근대교육은 개화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최초의 학교는 개화파의 인물들의 권유에 따라 덕원 주민들이 세운 원산학사로서 근대 학술과 무술을 가르쳤다. 같은 해 동문학 (일명 通辯學校)을 세워 영어를 교육하기도 했다.
나라에서도 본격적인 근대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1886년 미국인 교사 3명을 초빙하여 육영공원을 설립했다. 그러나 육영공원은 운영에서나 학교 선정에서 왕이 직접 관여했으며 종전과 같이 고관의 자제들로 입학을 허가했다. 좌원(左院)은 주로 연소한 문무 관리들이 출퇴근 하였고 우원(右院)은 선비들 중 재주가 있는 자를 가려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했다. 이런 여건에서 신문화 도입은 기대할 수가 없었고, 결국엔 1894년 학교를 폐지하고 말았다.
구미제국(歐美諸國)의 근대교육을 받아들여 본격적인 일선교육을 위한 학교설립은 기독교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1885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Appenzeller) 목사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서울에서 배재학당과 언더우드 학당을 창설하여 한국 근대식 교육을 실시했다.
배재학당은 1885년 8월 3일 아펜젤러가 설립함으로써 한국의 근대교육이 성장발전할 수 있는 동기를 마련했다. 1887년 6월 8일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란 사액(賜額)간판이 하사되면서 민족전체의 학교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1886년 고(告)에 정하 사랑방에서 ‘언더우드학당’을 시작했는데 이 학교는 학비와 숙식비를 무료로 하는 고아원 형식의 기숙제 학교였다. 그 후 ‘예수교학당’(1891), ‘민노아학당’(1893), ‘경신학교’(1905년)로 교명을 바꾸어 가면서 배재학당과 함께 한국초기의 근대식 남자학교가 되었다.
감리교 여자 선교사인 스크렌톤(M.F.Scranton)은 한국사회의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1886년 「이화학당」을 설립하니 이 학교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여성 교육기관이었다. 이는 여성교육 신기원이며, 여성학교에 근원적 이념을 형성한 것이다.
한편 국립병원의 간호원으로 한국에 온 엘러스(Miss. A.J. Ellers)가 1888년에 언더우드학당의 부대사업으로 시작된「예수교여학당」은 하이든(Miss M. E. Hayden)을 거쳐 1890년에 이르러 도티(Miss S. A. Doty)의 관리로 학교 모습을 갖추었고, 뒤에 정신여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894년에는 감리교파에서 평양에 광성학교 전신인 격물학당과 숭덕학당, 정의 여학교가 각각 설립되어 기독교계학교가 지방에까지 선교사는 지방학교 설치에 관한 정책을 결정하였고 선교지부가 설치되어 있는 전국 중요도시마다 남녀 중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도시와 지방을 막론하고 교회 옆에는 반드시 교회가 경영하는 소학교가 있어 한국 청소년의 교육을 교회가 일부 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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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9.07
  • 저작시기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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