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성경(성서)의 창조론과 진화론
Ⅲ. 성경(성서)의 종말관
Ⅳ. 성경(성서)의 믿음
1.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요 20:26-29)
2.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믿음(약 1:3-4)
Ⅴ. 성경(성서)의 복음
1. 왕국 복음(The Gospel of "The Kigdeom")
2.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The Gospel of "The Grace of God")
3. 영광스러운 복음(The "Glorious" Gospel)
4. 영원한 복음(The Everlasting Gospel)
Ⅵ. 성경(성서)의 해석
1. 지혜를 얻는 단계
2. 정경
3. 성경연구의 방법론
Ⅶ. 성경(성서)과 살인
1. 고의에 의한 살인
2. 과실치사(고살)의 경우
3. 도피성(Asylum)제도
Ⅷ. 성경(성서)과 로마
Ⅸ. 결론
참고문헌
Ⅱ. 성경(성서)의 창조론과 진화론
Ⅲ. 성경(성서)의 종말관
Ⅳ. 성경(성서)의 믿음
1.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요 20:26-29)
2.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믿음(약 1:3-4)
Ⅴ. 성경(성서)의 복음
1. 왕국 복음(The Gospel of "The Kigdeom")
2.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The Gospel of "The Grace of God")
3. 영광스러운 복음(The "Glorious" Gospel)
4. 영원한 복음(The Everlasting Gospel)
Ⅵ. 성경(성서)의 해석
1. 지혜를 얻는 단계
2. 정경
3. 성경연구의 방법론
Ⅶ. 성경(성서)과 살인
1. 고의에 의한 살인
2. 과실치사(고살)의 경우
3. 도피성(Asylum)제도
Ⅷ. 성경(성서)과 로마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 즉, ‘양자’라는 위치뿐이다. 실제로도 ‘안토니우스’가 많은 금액을 제시했지만, 카이사르 휘하에 있던 병사들은 카이사르의 양자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아우구스투스를 따랐다.
이러한 것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에 의해서 아우구스투스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카이사르의 ‘양자’라는 것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효과적이 아니더라도 치명적이 아니었다면 아우구스투스는 이 ‘양자’라는 것을 개인적인 이유에서라도 유지했을 것이다. 당시 ‘국가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였던 카이사르가 아무 것도 없던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해준 것은 그만큼 감동이었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신격화’가 되면서 자동적으로 아우구스투스는 ‘신의 아들’이 되었다. 이집트가 황제의 직할지가 된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도들은 다른 신들을 배척한다. 사정이 이러한데, ‘신의 아들’ 혹은 ‘신의 자손’인 로마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로마인들의 유대인 혹은 기독교에 대한 감정은 혐오에 가까웠다. ‘최고의 영광’이라 치는 공직에 전혀 진출을 하지 않는다. 그 뿐 아니라 군단에도 지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경제적 권리와 같은 권리는 동등하게 주어졌다. 로마 시민들에게는 얌체족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로마인들은 ‘인신 공양’을 혐오했다. 그런데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도들은 ‘포도주는 내 피요, 빵은 내 살이다’라면서 인신 공양적인 성격이 있었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의 편지에서 기독교도들에 대한 내용은 ‘혐오’ 또는 ‘미신’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둘의 차이는 이 뿐이 아니었다. 로마에서는 공직에 전혀 진출하지 않고, 군단에 지원하지 않는 것도 불만스러운데도 불구하고 인정해주고, 권리도 동등하게 부여했다. 모든 자유를 준 정도가 아니라 특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의 자유는 이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자유는 ‘신의 통치’ 즉, ‘정교일치’이다. 그런데 로마는 ‘정교일치’를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로마는 특혜를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불평불만에 반란을 일으키니 곱게 볼 리가 없다. 반면 유대인과 기독교는 정작 자유는 주지 않고, 모든 자유를 베풀었다고 하니 ‘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유대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로마의 태도가 어이없을 수밖에 없다. 멋대로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포함시키고, 내정간섭을 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이런 로마와 유대인 및 기독교도의 관계에 대해 로마 황제는 방관적인 입장으로 대처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독교를 탄압했다는 우리나라 기독교도들의 생각과는 달리, ‘고발’이 들어오고 나서야 처벌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나마도 로마인들이 중요시 여기던 ‘유피테르’와 같은 신의 신상에 예를 갖추면 풀어주는 식이었다. 물론 기독교도들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둘의 가치관은 전혀 달랐다. 여기서는 누가 옳고 그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로마인들의 기독교도에 대한 대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로마 황제는 기독교에 대해 방관적인 입장으로 대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되며 로마와 기독교는 방관적인 입장에서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다.
Ⅸ. 결론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형태로 책들이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어느 개인이나 단체가 제 멋대로 판단하거나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 책 자체가 사도적 저작인 동시에,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증적(自證的)인 품질이 독자에게 신언(神言)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좀 더 명확하게 어느 책은 성경이고 어느 책은 성경이 될 수 없다고 하는 확실한 한계를 그을 수밖에 없는 특수한 시기에 도달하였다.
그 이유는 영지주의자인 말시온의 운동 때문이었다. 말시온 일당은 다른 영지주의자들과는 달리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담아내는 포장품의 역할로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였다. 말시온은 주후 85년, 부유한 집안의 한 주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교회 지도자들과 교리싸움을 하고 고향 교회로부터 추방되어 주후 140년경 로마에 사는 영지주의자 Kerdon을 만나면서 유대교의 창조설화 해석을 배우게 되었다. 말시온은 이러한 해석을 구약에 적용시키면서 구약과 신약의 神을 별개의 神으로 보고 신약 가운데서도 유대교 색채를 삭제시켜 말시온 성서를 만들게 된다.
말시온은 제 멋대로 자기의 주장을 맞추기 위해서 모든 것을 왜곡 해석 했으며 성서를 자기 나름대로 자르고 붙였다. 이 때까지 교회는 아직 공식적인 정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는데 한 개인이 스스로 성서의 정경을 작성, 발표하였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정경화 작업을 착수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무라토리 정경 목록이라는 신약성서 목록이다. 이 목록이야말로 교회 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신약성서 목록이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주후 367년, 애굽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부활절 서신을 자기 교구의 여러 교회로 보내면서 지금의 신약성서와 꼭 똑같은 내용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이 목록은 신약 정경 형성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분계점을 이루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서방에서는 어거스틴도 이 정경 목록을 지지하였고, 마침내 제롬의 라틴어 번역을 통하여 전 서방 교회에 유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동방에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방교회의 정경과 동일한 정경목록을 가지는데 도달하였는데 수리아 교회는 22권만을 채택하였다.(cf. 베드로 후서, 요한23서, 유다서, 계시록 제외) 지금도 동방 수리아 교회는 여전히 22권의 신약성서를 정경으로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1. 김춘기(1998), 요한복음, 서울 : 한들
2. 김경래(1997), 사본들을 통해 보는 성경, 전주 : 전주대학교출판부
3. 대한성서공회(1980), 개역 한글판 ‘성경전서’
4. 박형용(1990), 믿음과 권면 그리고 삶-히브리서 11장 주해, 서울 : 성광문화사
5. 현경석(1993), 히브리서의 종말론, 미간행석사학위논문, 감신대
6. Kasemann, E,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역(1993), 로마서,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이러한 것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에 의해서 아우구스투스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카이사르의 ‘양자’라는 것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효과적이 아니더라도 치명적이 아니었다면 아우구스투스는 이 ‘양자’라는 것을 개인적인 이유에서라도 유지했을 것이다. 당시 ‘국가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였던 카이사르가 아무 것도 없던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해준 것은 그만큼 감동이었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신격화’가 되면서 자동적으로 아우구스투스는 ‘신의 아들’이 되었다. 이집트가 황제의 직할지가 된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도들은 다른 신들을 배척한다. 사정이 이러한데, ‘신의 아들’ 혹은 ‘신의 자손’인 로마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로마인들의 유대인 혹은 기독교에 대한 감정은 혐오에 가까웠다. ‘최고의 영광’이라 치는 공직에 전혀 진출을 하지 않는다. 그 뿐 아니라 군단에도 지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경제적 권리와 같은 권리는 동등하게 주어졌다. 로마 시민들에게는 얌체족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로마인들은 ‘인신 공양’을 혐오했다. 그런데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도들은 ‘포도주는 내 피요, 빵은 내 살이다’라면서 인신 공양적인 성격이 있었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의 편지에서 기독교도들에 대한 내용은 ‘혐오’ 또는 ‘미신’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둘의 차이는 이 뿐이 아니었다. 로마에서는 공직에 전혀 진출하지 않고, 군단에 지원하지 않는 것도 불만스러운데도 불구하고 인정해주고, 권리도 동등하게 부여했다. 모든 자유를 준 정도가 아니라 특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의 자유는 이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자유는 ‘신의 통치’ 즉, ‘정교일치’이다. 그런데 로마는 ‘정교일치’를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로마는 특혜를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불평불만에 반란을 일으키니 곱게 볼 리가 없다. 반면 유대인과 기독교는 정작 자유는 주지 않고, 모든 자유를 베풀었다고 하니 ‘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유대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로마의 태도가 어이없을 수밖에 없다. 멋대로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포함시키고, 내정간섭을 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이런 로마와 유대인 및 기독교도의 관계에 대해 로마 황제는 방관적인 입장으로 대처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독교를 탄압했다는 우리나라 기독교도들의 생각과는 달리, ‘고발’이 들어오고 나서야 처벌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나마도 로마인들이 중요시 여기던 ‘유피테르’와 같은 신의 신상에 예를 갖추면 풀어주는 식이었다. 물론 기독교도들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둘의 가치관은 전혀 달랐다. 여기서는 누가 옳고 그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로마인들의 기독교도에 대한 대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로마 황제는 기독교에 대해 방관적인 입장으로 대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되며 로마와 기독교는 방관적인 입장에서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다.
Ⅸ. 결론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형태로 책들이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어느 개인이나 단체가 제 멋대로 판단하거나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 책 자체가 사도적 저작인 동시에,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증적(自證的)인 품질이 독자에게 신언(神言)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좀 더 명확하게 어느 책은 성경이고 어느 책은 성경이 될 수 없다고 하는 확실한 한계를 그을 수밖에 없는 특수한 시기에 도달하였다.
그 이유는 영지주의자인 말시온의 운동 때문이었다. 말시온 일당은 다른 영지주의자들과는 달리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담아내는 포장품의 역할로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였다. 말시온은 주후 85년, 부유한 집안의 한 주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교회 지도자들과 교리싸움을 하고 고향 교회로부터 추방되어 주후 140년경 로마에 사는 영지주의자 Kerdon을 만나면서 유대교의 창조설화 해석을 배우게 되었다. 말시온은 이러한 해석을 구약에 적용시키면서 구약과 신약의 神을 별개의 神으로 보고 신약 가운데서도 유대교 색채를 삭제시켜 말시온 성서를 만들게 된다.
말시온은 제 멋대로 자기의 주장을 맞추기 위해서 모든 것을 왜곡 해석 했으며 성서를 자기 나름대로 자르고 붙였다. 이 때까지 교회는 아직 공식적인 정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는데 한 개인이 스스로 성서의 정경을 작성, 발표하였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정경화 작업을 착수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무라토리 정경 목록이라는 신약성서 목록이다. 이 목록이야말로 교회 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신약성서 목록이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주후 367년, 애굽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부활절 서신을 자기 교구의 여러 교회로 보내면서 지금의 신약성서와 꼭 똑같은 내용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이 목록은 신약 정경 형성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분계점을 이루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서방에서는 어거스틴도 이 정경 목록을 지지하였고, 마침내 제롬의 라틴어 번역을 통하여 전 서방 교회에 유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동방에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방교회의 정경과 동일한 정경목록을 가지는데 도달하였는데 수리아 교회는 22권만을 채택하였다.(cf. 베드로 후서, 요한23서, 유다서, 계시록 제외) 지금도 동방 수리아 교회는 여전히 22권의 신약성서를 정경으로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1. 김춘기(1998), 요한복음, 서울 : 한들
2. 김경래(1997), 사본들을 통해 보는 성경, 전주 : 전주대학교출판부
3. 대한성서공회(1980), 개역 한글판 ‘성경전서’
4. 박형용(1990), 믿음과 권면 그리고 삶-히브리서 11장 주해, 서울 : 성광문화사
5. 현경석(1993), 히브리서의 종말론, 미간행석사학위논문, 감신대
6. Kasemann, E,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역(1993), 로마서,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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