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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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식민지 근대화론
1. 식민지 근대화론의 등장
2. 식민지 근대화론의 형성과 발전

Ⅲ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
1. 자본주의 맹아론
2. 일제 조선토지조사사업 비판
3. 일제 조선공업화론 비판

Ⅳ 결론

본문내용

고유한 모순을 창출 하였다. 공업 부문의 불균등 발전은 근대적인 공장공업과 전근대적인 가내공업의 병존, 공장공업 내에서는 대공업과 중소공업의 연관성 결여 및 중소공업의 영세성으로 나타난다.
중소공장의 영세성은 금속공업·기계공업의 낮은 기술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자동기계를 채용한 몇몇 독점자본의 대공장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중소금속공장은 수공업적 기술에 기초하여 솥, 냄비, 농구 등의 간단한 주물제품을 생산하였고, 중소기계공장은 일본에서 들여온 중요 부품 조립, 가공이나 기계기구 수리에 국한되었다. 또한 불균등 발전은 노동력에도 반영되어 숙련노동자와 미숙련노동자의 병존으로 나타난다. 대공장의 작업은 자동기계와 결합된 비숙련노동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반면, 소공장의 작업은 숙련공이 작업을 통제하는 수공업적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중소공장의 영세성은 독점자본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 협소한 시장을 놓고 다수 중소자본의 치열한 쟁탈전을 초래하였고 경기변동에 따른 극심한 동요를 낳았다.
이러한 불균등 발전은 국내적인 재생산연관이 결여된 공업구조의 분단성에 의하여 유지·강화 되었다. 제철소에서 생산된 선철은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일부 생산된 강철도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되어 여타 금속공업이나 기계공업으로의 공급이 차단됨으로써 기계공업은 일본에서 들어온 기계제품의 조립·수리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방직공업에서는 공판된 면화, 누에고치 및 생사 대부분이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1930년대 중반 일본에서 진출한 면방적공장이 세워지기 전까지 면방직공자에서 사용하는 면사는 일본에서의 이입에 의존하였다. 또한 면직물의 종류별 재생산과정을 보더라도 고급 면직물은 조선 내의 원료 및 생산시설 없이 대부분이 일본에서 이입되며, 저급 면직물은 공판을 통하여 면화를 매수한 후 면방적공장에서 생산되며, 재래 면직물은 농가의 자가소비용 면화를 가공하여 생산되는 상이한 재생산 과정을 거친다.
전시통제경제로의 전환은 이러한 불균등 발전을 더욱 심화시키는 동시에 모순을 격화시켰다. 1938년 ‘공업조합령’의 공포는 공업 전반을 독점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한 통제속으로 재편성하는 동시에 중소공업을 대공업에 하청 계열화 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1940년부터 공업소조합제도를 실시하여 공업조합 내에 포괄할 수 없는 영세업자도 통제 내로 끌어들였다. 1942년 ‘기업정비령’은 군수공업화를 더욱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중소공업을 군수 관련 업종으로 전환하거나 기업합동이라는 형태로 소비재 관련 업종의 생산설비를 군수 관련 업종으로 전환함으로써 군수 관련 업종은 급성장한 반면, 대다수 소비재 관련 업종은 몰락하였다. 또한 공업원료의 공급이 두절되자 강제적 할당과 공출이 수행되었다. 면화의 경우 1933년부터 공판제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면방적 자본에 안정적으로 원료를 공급하였으며, 1940년을 전후하여 농가의 자가용 면화까지도 강제로 공출함으로써 농가의 가내 직물업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식민지 군수공업화가 조선에서만 시행된 것도 아니었다. 시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본 자본주의의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대만과 만주에서도 군수공업화가 추진되었다. 만주에서는 조선보다 먼저 중화학공업화가 추진되었다. 대규모 군수공업을 만주에 건설하여 일본군의 전진기지로 삼을 목적에서 군수공업 주도의 통제경제체제를 만주에 구축하려는 산업개발계획이 관동군주도로 입안되었다. .
일본 자본주의의 모순 격화는 식민지의 공업화와 더불어 숙련노동력의 창출로 나아갔다. 식민지 공업화는 일본에서 건너온 기술자·숙련노동자와 조선인 미숙련노동력의 결합에 의하여 진행되었으나 전쟁확대로 인한 징집으로 일본에서 숙련노동력의 공급이 두절되었으며, 조선 군수공장에 근무하는 일본인 숙련노동자 중에서도 입영자가 급증하였다. 숙련노동자 부족에 직면한 일제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기술학교의 설립·확충, 공장 내 숙련공 양성 및 일본 연수등의 방법으로 숙련 노동력을 양성하였다. 1937년부터 총독부의 보조금으로 조선공업협회에서 숙련공양성소를 설치하여 직업훈련을 실시하였으며 조선질소는 공장 내에 흥남공수양성소를 두어 숙련공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졸속적인 기술교육과 숙련직의 조선인 노동력으로의 대체는 많은 안전사고를 초래하였다.
Ⅳ 결론
이번 주제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나 자신 또한 과연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이 우리나라에 투자한 것이 과연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눈에 띌만한 성과를 가져다 주었을까하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그 당시 조선사회의 상황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고 자본주의의 형태가 서서히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내 생각에는 생각보다 아주 미미 했을 것이라 판단된다. 그 상황에서 과연 일제강점기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니 분명 초기의 발전의 속도는 느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발전의 속도가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일제강점기 없이 일정수준에 까지 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을지도 모르지만 일정 수준에 도달한 이후에는 아마 서양과 같이 폭발적으로 빠르게 성장하지 않았을까? 일제강점기인 35년의 시간동안에 초기에 일제에 의해서 농업, 산업, 교통 등 여러 분야에서 투자를 통해 빠르게 발전하기는 했지만 그 기간 동안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수탈당했던 것들을 생각해본다면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일제에 의해 발전된 모든 것들은 오로지 일제가 우리나라를 수탈하기위한 즉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함이지 절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위해서 투자했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이다. 그동안 단순히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로 부터 많은 것을 강탈해갔다고만 생각했지 여러 자료에 나타나있는 객관적인 수치를 보니 정말이지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앞에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제가 우리나라에 투자한 금액의 수백 배 아니 수천 배 수만 배의 부당이득을 챙긴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가 말해주듯이 일제가 없었더라도 근대화 과정이 조금 느리기는 하겠지만 분명 근대화가 이루어 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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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9.01
  • 저작시기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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